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창고지기들 2020. 2. 28. 16:58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이민자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속설 하나가 있다. 

본디 이민자의 직업이란 

맨 처음 공항으로 픽업 나온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가령, 슈퍼마켓을 하는 사람이 픽업을 나오면 슈퍼마켓을, 

세탁소를 하는 사람이 픽업을 나오면 세탁소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 유학생 시절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 것은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주인공 기 롤랑의 처지가 

이민자와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을 상실한 지 십 년. 

그 동안 기 롤랑이 한 일은 그를 처음 픽업해준 

위트와의 동업이었다. 

의뢰자의 요청에 따라 비밀리에 

누군가의 뒷조사를 하는 흥신소 일. 


사실, 타국 땅에 이제 막 도착한 이민자의 상태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이나 매한가지다. 

전혀 새로운 나라, 문화, 언어,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새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는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과거의 자신을 잊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만났던 남미 분들은 대개 허드레 일들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들 중 상당수는 본국에서 

인텔리(선생님이나 교수)로 살았던 자들이었다. 

가짜 기억 상실증에라도 걸리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곳이 그들의 이민 현실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십 년 뒤, 위트와 기의 흥신소 사무실은 문을 닫는다. 

언제나 함께였던 위트가 떠난 뒤, 

기는 잃어버린 기억, 잊어버린 과거와 자신을 찾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일은 지금까지 기가 해오던 일의 연장이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의뢰인이 자기 자신이고, 

별다른 사례가 없다는 것일 뿐.


이후 소설은 기의 과거,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을 잃어버리기 

바로 직전까지의 사연을 들려준다. 

몇몇 불확실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 

그들이 건네준 빈 과자 통 속의 낡은 사진 몇 장들과 

오래된 전화번호나 주소 같은 것들을 단초로 

구성되어지는 과거의 퍼즐 조각 맞추기. 



그리고 나는 마지막 시도를 해볼 필요가 있었다. 

즉 로마에 있는 나의 옛 주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지’에 가보는 것 말이다. 

-본서 중에서


소설 말미에서 기는 자신의 방향을 분명히 한다. 

결국,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찾아가보고 말겠다고. 

하지만 그곳을 찾아갈 때까지 

거치고 지나가야 할 길들이 수두룩이다. 

일개 독자로서 소설이 그쯤에서 끝난다는 것에 

한편으로 안심이 되었다. 

그 만큼 주인공 기는 

내게 매력적인 캐릭터는 아니었던 것이다. 

미안~;; 


과거에 천착하여 집요하게 매달리고 

헤매는 이야기는 몽환적이다. 

연기와 같이 실재하는듯하나 

실체가 곧 사라져버리는 대상은 

늘 환상으로 분칠을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 전체, 

곧 기의 추적을 따라 그의 과거를 파헤치는 과정은 몽환적이다. 

그리하여 치밀한 미스터리 장르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크게 실망을 하고 말테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 

그것도 기억상실로 인하여 객관화되고 사물화 된 과거를 

무덤덤한 감정으로 찾아나서는 일 자체가 가지고 있는 

허무함이라는 특성을 본능적으로 직감하는 독자라면 

소박한 재미를 느끼면서 읽을 수 있을 테다. 

게다가 분량도 많지 않으니, 부담 없이. 


읽으면서 재미를 느꼈던 것은 기억의 그러함이다. 

시각적인 환경들과 사물들을 통해서 

봉인된 기억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주인공 기의 노력은 

대강 헛수고였다. 

주의를 기울여 집중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낭비하여 

휘발시켜버리는 것이 일상이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오래도록 숱하게 접해왔던 일상의 사물들로부터는 

그 어떤 기억의 단초도 제공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냄새나 두려움과 같은 감정, 

혹은 후회 같은 심리 상태는 오래 남는다. 

그것은 악착같이 기억을 붙들고 시간을 견뎌낸다. 

더불어 습관. 

그것은 피부의 주름처럼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선명히 남는다. 


또 다른 재미를 느꼈던 부분은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의 양과 

기가 조사를 통해 찾아낸 기억의 양이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추측이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반면, 

기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인식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는 자신의 과거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겠고, 나는 과거를 뒤로 한 채 

한 치 앞만 보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것일 테다. 


과거를 추적하면서 살아가는 오늘은 

어쩐지 서글프다는 생각이 든다. 

미래를 위해 사는 오늘은 피곤하고 말이다. 

그저 과거를 대충 기억하고, 

미래를 대강 위하면서 오늘에 집중하면서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때때로 어떤 오늘은 

과거의 어느 한 시점을 주목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 그 과거는 회개가 됐든, 치유가 됐든, 

위로가 됐든 오늘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런 걸 나는 은혜라고 부르는데, 

어쨌든 계속될 기의 여정에 은총이 가득하길 바래본다. 

그리고 그와는 달리 

작정하고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찾아 나설 일 없는 

오늘, 그 오늘이 나는 그저 감사하다.




#Feb. 25. 2020.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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