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번제
그 시절 내가 다녔던 곳은
피트니스(세련된 느낌을 풍기는)가 아니었다.
정확히 ‘헬스클럽’이었다.
땅땅한 관장님이 운영하던 상가 2층 헬스클럽은
거대한 역기들과 묵직한 아령들만 난무하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20대 초반의 풋풋했던 나는
러닝머신(트레드밀)이나 자전거
혹은 스탭퍼와 같은 운동 기구 대신에
관장님의 호령에 맞춘 줄넘기로
유산소 운동을 해야만 했다.ㅋ
그러던 어느 날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그 날도 나는 동료 여학우 3명과 함께 살고 있던
대학교 여자 기숙사 방안에서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방 문에는 전신 거울이 달려있었는데,
마침 민소매 차림으로 있던 나는 거울 앞에서
장난스럽게 프런트 더블 바이셉스(Front double biceps) 포즈를 취했다.
곧바로 당혹감이 들불처럼 얼굴에 번졌다.
거울 속 여자의 어깨와 팔에
심상치 않은 근육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멋져 보인다는 친구들의 말이 들릴 리 없었다.
거울 속 그녀가 나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까닭이었다.
그 길로 헬스클럽 관장님과는 영원한 작별이었다.;;
'간절히 되고 싶은 나'와
'지금 실제의 나' 사이에 놓인 길은 제법 넓다.
그 사이에서 나는 끊임없이 방황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성가시게 구는 중이다.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1:9)
개신교 선교사로 불리며 살아가는 중이다.
인생을 그분께 헌신한 셈이다.
그러나 그것에 만족할 분이 아니다.
그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대놓고 매일 저녁과 아침으로
번제를 요구하시는 분이다.
번제는 제물의 전부를 불살라 드리는 제사다.
그렇게 그분은 나의 매일, 곧 내 일상의 시작과 끝을
온전히 헌신하기를 요구하시는 욕심쟁이다.
인생 전체를 헌신한 것과
구체적인 매일의 일상을 송두리째 헌신하는 것은 별개다.
그 양편은 저절로 연결되지 않는다.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과 훈련이 무참히 요구될 터이다.
내가 ‘간절히 되고 싶은 나’는 인생 전체와 마찬가지로
매일의 일상까지 모조리 그분께 헌신하는 나다.
나를 번제의 제물로 그분께 싹 다 드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나’는 다르다.
인생 전체면 충분하지, 매일의 일상까지
모조리 쓸어 담아 제단 위에 불사르려 하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끓어오르는 억울함과 함께
손해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근면히 역사하는 탓이겠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알고 있다.
사실은, 제단 밖에 남길 게 없다는 것과
남기는 것이 곧 낭비라는 것을 말이다.
나란 종류는 얼마나 어리석은지!
예쁘기 보다는 멋있는 가수 에일리가
부른 노래 <If you>를 좋아한다.
노래는 전체적으로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보컬이 만들어내는 세련된 그루브로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가끔씩 이 노래를 들으면서
그녀의 가이드를 따라 후렴구를 함께 부르기도 한다.
If you~
내 사랑이 100이었다면
그 반을 남겨놓지 않았으면
내 곁에 아직까지 있을까
사랑은 하고 있을까 우린
다 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어
난 다만 시간이 필요했어
몇 번의 이별에
다친 내 기억에 다 주기 겁이 났어
자기 사랑의 전부를 주지 못한 여자의 회한이 묻어나는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사랑이 제사와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제사에 있어서 디폴트(기본값)는 번제다.
자신의 전부를 태워 헌신하는 일이 사랑인 것이다.
성부가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 전부인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았듯이,
성자가 성부와 세상을 위해 자신의 전부인 생명을
아낌없이 바쳤던 것처럼.
사랑의 제단 위의 불이 꺼지는 일은 없다.
전부를 드릴 능력이 없는 어리석은 자는
그 앞에서 항상 면목이 없다.
전체를 드리고 싶은 나와 그럴 재간이 없는 나.
그 무능력이 슬픔의 꽃을 피운다.
지천으로 핀 꽃들 중 한 송이를 꺾어 제단 위에 던진다.
그리고 전부가 아니고서는
결코 그 아로마(향기)를 흠향하지 아니하시는 분에게
고백한다.
“다 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다만 시간이 필요해요.
지나간 일들이 남긴 상처와 거짓말에
다 주기 겁이 났을 뿐이니,
다만 당신의 은혜가 필요해요.”
#Sep. 10. 2019.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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