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책, <인간의 조건>을 읽고.
무슨 보약도 아닌데, 한 달 동안 꾸준히 복용하듯 읽었다.
시간 맞춰, 정해진 분량을 꾸역꾸역 읽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반드시 완독하고 말겠다는 치기어린 승부욕
(이런 게 아직 남아있다니!ㅋ).
이와 같은 승부욕은 상대(철학)가 만만치 않다는 것 외에
불친절한 번역에 의해 촉발되었다.
번역자는 분명 한국인 독자보다
원문 텍스트를 중요하게 여긴 듯 보인다.
그래서 한국인 독자는 자주 문장 안에 갇히고,
더러 문장의 턱에 걸려 넘어지느라
많은 시간을 소진해야만 했다.^^;;
<인간의 조건>이라는 제목은
인간이 조건 지어진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해준다.
이때 인간이란 개인과 인류 모두를 포괄한다.
하지만 저자는 방점을 찍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조건’이다.
즉, 존재적 인류나 실존적 개인이 아니라
그의 조건인 무대 곧 배경과 그의 활동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저자는 인간의 활동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한다.
이유는 인간의 배경은 단순한 반면,
활동은 복잡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대인 배경은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시간적 배경은 탄생과 소멸이고,
다음으로 공간적 배경은 지구다.
비록 인간이 영원성이 아닌 불멸성을 추구하고,
지구가 아닌 우주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시간과 지구를 제거한 인간은 인간일 수 없다.
노동, 작업, 행위는 인간 활동의 삼부작이다.
각각의 활동을 쉽게 이해하는 일은 비교적 쉽다.
각각의 단어에 형용사적 명사를 붙여
거칠게 단순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가사 노동, 창작 작업, 정치 행위와 같이 말이다.
노동은 동물로서의 인간이
생존을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며,
죽기 전까지 꾸준히 해야 하는 일이다.
주어진 자연(조건) 안에서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들이 여기에 속하는데,
여기에서 애용되는 언어는 생산과 소비다.
작업은 제작인으로서의 인간이 행하는 모든 창작 활동을 의미한다.
각종 예술 활동과 과학과 기술과 탐구의 제반 활동 등이 이에 속한다.
작업을 통해 인간은 주어진 자연에서 벗어나 인공 세계를 창조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만든 도시는 작업하는 인간의 자연이고,
나아가 인간은 주어진 지구를 어떻게 해서든
자기 힘(상상력과 과학 기술)으로 탈출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행위는 노동과 작업을 중재한다.
이때 ‘철학’이 설 자리는 바로 이 행위에 있다.
철학 노동, 철학 작업, 철학 행위 중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아무래도 철학 행위다.
실제로 행위는 철학의 도구인 사유와 언어를 통해 구체화 된다.
게다가 고대 철학자들에 의하면 행위야 말로
자유인(철인)들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들에게 노동은 노예의 것이요,
작업은 장인들과 예술가와 과학자들의 것인 반면,
정치 행위야 말로 가장 인간다운 자유인의 활동이었다.
인간은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 세 활동들을 하면서 역사를 만들어 왔다.
나 역시 노동을 하는 동시에 작업을 하며,
작업과 함께 행위를 병행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 작업과 행위를 모두
노동의 손아귀에 집어넣으려는 자들의 주장을 듣기도 했고,
과학 기술 작업을 통해 새로운 세계 창조에 대한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적 견해를 듣기도 했으며,
권력을 독점하고자 했던 행위(전체주의적)의 폐해와
멸망을 목격하기도 했다.
결국 인간의 세 활동은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상호 공조 속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듯하다.
저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생명성(노동), 세계성(작업), 다원성(행위)은
무엇도 포기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세 조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개혁 교회가 훨씬 위험스러웠다.
그는 큰 존경과 더불어
매우 염려스러운 눈길로 그 시대의 종교부흥,
즉 ‘새로운 수도원’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수도원장과 성직자의 방탕에 의해
종교가 몰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들에게
선하하게 살지 ‘악에 저항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 결과 ‘사악한 지배자들이 원하는 대로
악을 행하게 되었다.’
-본서 중에서
=개혁 교회 전통에서 자라온 나에겐 꽤 서늘한 지적이다.
지금껏 나의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적인 경건으로서의
선한 삶을 추구하도록 가르치는 데는 열심을 다했어도,
사회의 악에 저항하는 것에는
격렬하게 소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인 까닭이다.
그리하여 개인적 선한 삶에 충실하느라 교단 총회와 신학교,
나아가 나라와 세계에서 권력과 행정 농단을 일삼는 자들을
방관해왔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나라와 국제 정세에 대해
방관하거나 비판하는 수준에 있었다.
그러다 최근에 그것을 본격적으로 기도에 끌어들이게 되었다.
악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기도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악에 대한 최선의 저항은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면서
내 주께 그것을 고자질(!)하고 간구하는 것이기에!
권력은 강자를 파멸하기 위해 약한 자가
함께 연대할 때 비소로 부패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부패하지 않는다.
홉스에서 니체에 이르기까지,
근대가 예찬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한 권력에의 의지는
결코 강자의 특징이 아니며,
오히려 시기와 질투처럼 약자의 악덕에 속한다.
그리고 잠재적으로는 약자의 가장 위험한 악덕이다.
-본서 중에서
=권력에의 의지로 흥분 상태에 있는 자들을 목격할 때마다
두려움과 함께 안쓰러운 감정이 든다.
자신이 갖고자 하는 힘의 치명성을 모르면서
그것을 획득하고자 자기 생명과 타인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그들의 무지와 무모함 때문이다.
나 역시 약자이기에 권력을 욕망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 경우, 그것이 없다는 불만보다
그것이 처음부터 내게 없었다는 이유로 훨씬 더 많이 감사한다.
그것이 내게 있다면 남용하여 타인뿐만 아니라
나에게 까지 위해를 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망하게 된다.
나와 같은 치들 말고, 권력의 치명적 위험과
그것의 정체를 바로 알고 두렵고 떨림으로
그것을 다룰 수 있는 덕 있는 자들에게
그것이 맡겨지기를.
자신이 무엇을 행했는가를 알지 못하고,
알 수 있다 할지라도 행한 것을 되돌릴 수 없는
무능력인 환원불가능성의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은
용서하는 능력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인 예측불가능성의 치유책은 약속을 하고
또 그 약속을 지키는 인간의 능력에 내재해 있다.
이 두 능력 가운데 하나인 용서하는 능력이,
다모클레스의 검처럼 모든 새로운 세대에 걸쳐
그것의 ‘죄’ 값을 치러야 하는,
과거의 행위를 구제한다는 점에서 이 두 능력은 동질적이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는 능력은
미래라는 불확실성의 바다에 안전한 섬을 세우게 한다.
이 섬이 없다면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지속성은 물론이고 연속성조차 갖지 못한다.
-본서 중에서
=용서와 약속.
죄를 짓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자에게 용서는 없다.
약속을 깨고 지키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곤경과 불확실성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이 부정하는 자신의 무거운 죄를 짊어지고
불확실성한 바다에 뛰어든 것이기에 결과는 침몰뿐이다.
아득한 심연, 그 검은 바다 속으로의 멸망.
용서를 구하지 않는 자,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자들에게 구원은 없다.
안타깝게도.
이야기의 완전한 의미는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만 알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장인이 미리 인지한 이미지나 모델이 제공하는
빛에 의해 완성된 생산품이 평가받는 제작과는 달리,
행위의 과정과 더불어 모든 역사의 과정을 밝혀주는 빛은
역사의 종점에서만 나타나며
대개는 모든 참여자가 죽었을 때 빛난다.
행위는 이야기꾼에게만 완전히 계시 된다.
참여한 사람보다 모든 것에 관해 더 잘 아는
역사가의 회고에서만 완전히 드러난다. …
설령 이야기가 행위의 필수적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이야기를 인지하고 ‘만드는 자는
’ 행위자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다.
-본서 중에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활동은
노동, 작업, 행위를 모두 포괄한다.
그 분은 인간으로 태어나 생계 노동을 하셨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작업과 함께
그것을 전하는 정치적 행위 모두를 하셨다.
그렇게 그분은 종교인들의 손에 의해서
정치 세력인 빌라도에게 넘겨져
종교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셨고,
또한 신학적인 이유로 부활하셨다.
이 모든 이야기는
이야기꾼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의해서 전해졌다.
물론, 분량 면에서 예수님의 활동은 행위 면이 월등이 많다.
그래서 그분의 활동이 ‘구원 행위’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증인이라고 여기는 나는 행위자인 동시에 이야기꾼이다.
증인으로서의 내 행위는 전부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감, 질감, 색감을 단 번에 표현하는 붓질,
제 각각의 소리를 동시에 들려주는 화성,
뭐 그런 것들이 삶에서 느껴지는 대목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세계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이 세계를 위한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웅장하면서도 간결한 표현은,
복음서가 그들의 ‘기쁜 소식’을 천명한
몇 마디 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
-본서 중에서
=탄생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비록 그것의 끝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죽음을 목적으로 태어나는 인생은 없다.
그러므로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 절망과 실망을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다.
탄생은 기억되어야 하고, 기억해야만 한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다.
그리고 그 아이는 매해, 매일, 매순간 태어나며,
앞으로도 영원히 태어날 것이다.
한 때 스승이자 연인이 무려 하이데거였고,
이후 후설을 거쳐 만난 박사 논문 지도 교수가 야스퍼스인 한나 아렌트.
나아가 브레히트, 벤야민, 츠바이크와 교류했던 그녀는
그야말로 화려한 인맥을 가졌다.
그런 그녀의 글에서 느낀 것은 철학자로서의 예민함과 집요함이었다.
그녀는 선배 철학자들의 글을 예민하게 읽고 사유했던 후배 철학자인 동시에
자신의 철학을 집요하게 풀어 소개한 선배 철학자였다.
그래서 철학자가 아닌 나와 같은 독자는
‘뭐 이렇게 까지?’ 하면서 질려버리는 것이겠지만,
그런 이유가 언니(?!ㅋ)를 대단하게 여기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 때문에 독서의 입맛이 여간 까칠해진 게 아니다.
문장 안에 갇히지 않거나,
최소한 문장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해줄
책이 간절하다.
뭐가 있으려나? ㅋ
#Aug. 1. 2019.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