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죽음의 수용소에서

창고지기들 2019. 7. 15. 03:27







빅터 프랭클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본서 중에서)


로고테라피는 환자(?!)에게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삶의 의미를 찾게 도와줌으로써 

아픈 정신(혹은 마음)을 치료하는 이론이다. 

그것을 창시한 빅터 프랭클은 

로고스의 뜻을 ‘의미’로 소개한다. 

그리스어 로고스는 내게도 몹시 친숙한 단어다. 

물론, 내게 로고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오랫동안 지속해왔던 말씀 묵상 모임을 통해 

내가 해왔던 것은 일종의 로고테라피였다. 

말씀이라는 절대가치에 비춰 각자의 고통을 새롭게 조명하고, 

나아가 고통을 재료로 선한 것을 창조하는 상상력을 

제공받아왔던 것이 나의 말씀 묵상 모임이었던 게다. 

이것을 통해 우리들이 길렀던 덕목이 

빅터 프랭클이 지적했던 

책임감과 초월적 안목이었음은 물론이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해보자. 

배고픔이라는 절박한 압박이 점점 커짐에 따라 

각 개인의 차이는 모호해지고, 

그 대신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표현하는 

단 하나의 목소리만 나타나게 된다. 

-프로이트의 말(본서 중에서)


프로이트는 전시대의 인식을 전복시킴으로써 

마르크스와 니체와 함께 새 시대를 연 인물로 유명하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은 

의식(이성)과 합리성(도덕)의 존재가 아닌 

무의식(욕구)과 비합리성(쾌락)의 존재다. 

그래서 위와 같은 억측(?)을 자신만만하게 

또한 공공연하게 주장한 것이었겠으나, 

축소주의는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다.



백부장과 및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마27:54)     


백부장과 병사들은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을 지켜보았고, 

자기 목격을 통해 결론을 내렸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와 같은 결론은 예수께서 

지금껏 십자가 처형을 받아왔던 다른 죄수들과는 

명백히 달랐음을 입증한다. 

주께서는 

자신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아셨고, 

극악한 고통 중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면서 

의연히 죽음을 맞이하셨던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를 몸소 경험했던 빅터 프랭클은 

프로이트의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에 따르면 

가장 기본적인 욕구마저 박탈된 수용소에는 

프로이트의 말대로 짐승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비록 소수이나 성자(聖者)들도 존재했던 것이다. 

십자가 위에 있었던 자가 

욕지거리를 쏟아내면서 짐승처럼 죽어간 강도만이 아니라,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의 죄를 대신 빌면서 인간답게 죽어간 

예수도 있었던 것처럼. 



인간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본서 중에서


다채로움.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그러함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비롯한 인간에게 실망은 할지언정 혐오하지는 않는 것이고, 

프로이트와 아들러와 빅터 프랭클를 모두 친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은 자동차를 타고 모험을 떠나는 내게 반드시 필요한 동반자다. 

프로이트는 자동차의 미러(룸 앤 백)이고, 아들러는 전면 유리, 

그리고 빅터 프랭클은 최종 목적지로 인도하는 

네비게이션 쯤이 되지 않을까? 

운전자는 도로의 상황과 여건에 따라 

무엇을 이용할 것인지는 판단하여 선택해야 한다. 

지나치게 한 가지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두루 보고 사용할 줄 안다면 

모험에 필요한 돌파력과 지구력은 향상될 것이다.     



슬프다! 

수용소에서는 그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용기를 주었던 그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여! 

슬프다! 

마침내 자유가 실현되었을 때, 

모든 것이 자기가 꿈꾸어오던 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여! 

… 

인간은 대개 그루터기밖에 남지 않은 일회성이라는 밭만 보고, 

그 행동과 기쁨과 심지어 고통까지도 구원해준 

과거라는 곡창은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향이 있다. 

-본서 중에서


돌이켜 보면 아프리카 케냐는 

개인적으로 죽음의 수용소와 같은 종류였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구인 생리적·안전·소속감의 욕구가 

모두 박탈되었던 곳이었던 게다. 

물과 전기(인터넷)의 불안정성, 직접적인 강도와 테러의 위협, 

그리고 무엇보다 영적 공동체의 상실은 

현실을 무시하거나 혹은 거짓 환상을 만들게 했고, 

결과적으로 나는 땅 위가 아니라 

허공 위에서 살아가는 것 같은 비현실감으로 

괴로워해야만 했다.


죽음의 수용소 이후 맞이했던 안식년은 

수순에 따라 환멸의 축제였다.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용기를 주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토록 꿈꿔왔던 환대와 안식은 

환상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환멸의 무덤인 그곳을 생각할 때마다 

어리석은 나는 슬픔을 느낀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는 그 무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면서 수용할 것임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 때까지 <사막의 보물창고>가 

구원의 곡창으로 지속되기를, 

의미가 쌓여가고 축조되어 

결국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기를!





Jun. 30. 2019.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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