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게으른 열심

창고지기들 2019. 4. 23. 18:23







게으른 열심



노를 젓 듯이 머리를 앞뒤로 흔들면서 길을 건너는 비둘기. 

분주하게 종종걸음 치는 짧은 다리. 

‘날개는 뒀다가 어디에 쓰려고?’ 

피식 나오는 웃음. 

다음 순간, 비둘기를 향해 뛰어 돌진하는 꼬마 녀석. 

화들짝 놀라는 비둘기. 

뒷짐 지고 있던 날개가 속히 풀리면서 

저만치 따돌려지는 아이. 


비둘기 날개처럼 뒷짐 지고 있던 

나의 습관 하나를 발견케 된 것은 그날이었다. 

구별 짓기. 

명확한 기준을 따라 확실히 구별하고 까다롭게 분류하여 

자리(정체성)를 정해주는 일에 나는 자동적이 된다. 

내 습관의 첫 번째 대상은 가재도구. 

덕분에 집안은 정리가 잘 되어 있으나, 

강박 까지는 아닌 관계로 

어디까지나 대체로 잘 되어 있는 편이다. 


다음 대상들로는 내 자신(정체성), 이웃, 

모임, 단체, 사역, 사건, 취향…. 

사회적 관계 망이 협소하여 

구별 짓기의 대상이 많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문제는 양이 아니라 성질이다. 

물건이 아닌 사람에 관한한 

명쾌한 구별 짓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고작해야 애매모호한 구별 짓기나 가능할 뿐인데, 

그럼에도 분명함에의 갈망과 지적 나태함

(개별적으로 상대하여 인격적으로 알아가려 하지 않는 태도)은 

지속적으로 구별 짓기를 고집한다.  


다시 그날, <구별 짓기>라는 습관을 발견한 날로 돌아가서, 

뒷짐 지고 있던 습관이 놀라서 날개를 활짝 핀 이유는 

한 아이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의 습관은 <열심>이었다. 

아이는 열심히 기도했고, 열심히 성경을 읽었고, 

열심히 밥을 먹었다. 

그리고는 신속한 기도 응답을 열심히 자랑했다. 

자기 열심의 이유가 효과성과 생산성에 있다는 것을 

홍보라도 하듯이. 


그럼에도 내 편에서 아이는 

김빠진 미지근한 탄산음료 같았다. 

그것을 탄산음료답게 하는 탄산도, 

청량감을 북돋워주는 시원함도 잃은 들쩍지근한 물. 

콜라 아닌 콜라, 사이다 아닌 사이다, 환타 아닌 환타. 

결국 구별 짓기라는 내 습관을 발견하는 것으로 만족(?)한 채, 

아이에 대한 구별 짓기를 포기하고는 작별을 고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갈 4:17-18)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열심을 낸 자들은 유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복음을 주장하면서 

갈라디아 교회와 바울 사이를 이간질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이 때 ‘다른 복음’이란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이라는 뜻이다. 

바울의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 다른 복음은 예수를 믿는 것 외에 

율법과 할례도 행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대주의자들은 다른 복음을 호위하기 위해 

바울의 사도권을 물고 늘어졌다. 

바울은 예수께서 직접 임명하신 오리지널 사도가 아님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 또한 정통일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율법과 할례를 첨가하는 것뿐이고, 

바울이 오리지널 사도가 아니라는 것 또한 사실이었던 바, 

갈라디아 교인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미약한 단발성 흔들림이 아니었다. 

작음 흔들림은 마중물이 되어 결국 태풍을 불러와 

교회를 삼켜버릴 위력을 갖게 될 것이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아 2:15)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 교회를 허무는 교묘한 작은 여우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핵심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다만 율법과 할례 행함을 슬쩍 첨가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며, 

나아가 성도들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믿음이 아니라 

보이는 행위에 치중하게 만들어 결국 구원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위력을 가진 것이었다.


또한 유대주의자들은 

랍비들이 직접 제자를 뽑아 정통 제자를 길렀던 것처럼, 

예수님에 의해 직접 뽑힌 사도 이외의 사람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다. 

즉, 그들은 예수님과 복음 사역을 인간의 전통으로 제한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라면,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탁월한 랍비일 뿐이며, 

복음은 유대적 율법주의와 다를 것이 없게 된다.


반면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을 복음 전파자, 

곧 사도로 부르셨다고 주장한다. 

즉, 그의 사도성은 예수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부여받은 것임으로 

사람의 전통이 아니라 영의 권위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 사역은 

랍비가 자기가 고른 제자들에게 자기 지혜를 전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자신이 선택한 자들로 하여금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하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율법과 할례를 주장했던 유대주의자들의 습관이자 자랑은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들 열심의 정체는 복음을 축소시키고 변질 시키는 누룩이었다. 

그리고 그 열심은 다름 아닌 나태와 동전의 양면이었다. 

즉, 일상의 전 영역을 아울러야 하는 복음을 종교 영역으로 제한시켜 

종교 활동에 대한 열심만으로 믿음의 정도를 판단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말씀을 일상의 전 영역과 연결시켜 순종하는 것은 

부지런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일 뿐더러 

표시도 잘 나지 않는 일이다. 

그에 비하면 각종 예배와 모임과 봉사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만으로 믿음의 정도를 드러내려는 것은 

트로피는 받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게으르기 그지없는 짓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종일 강조하는 

그리스도인 덕목은 <열심>이 아니다. 

복음으로 일상의 전 영역에 역사하도록 하는 

<믿음, 소망, 사랑>을 강조한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열심>이 최고의 미덕이 되어버린 교회가 적지 않다. 

덕분에 <열심>하나로 요직을 차지하여 교회를 흔드는 부류들로 

교회가 몸살을 앓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게다가 가만히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숙주로 삼아 

자기 세를 불리는 이단의 특기 또한 <열심>이다. 

그러나 <열심>은 최고일 수도, 최선일 수도 없는 

단지 하위 덕목일 뿐이다. 

열심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과 목적이다. 

잘못된 방향과 목적에 대한 열심은 악덕일 뿐이다.


선교지에서도 이단들은 특유의 <열심>으로 득세하는 중이다. 

그들의 <열심> 앞에서 움츠러드는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가책도 더러 노크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의 방향과 목적임으로 

가책일랑은 번번이 거절한다. 

대신에 눈에 보이는 열심에 현혹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이면을 꿰뚫어 볼 수 있기를 간구한다. 

그리하여 다른 복음을 향한 게으른 열심과 

참 복음을 향한 근면한 열심을 구별 짓고, 

표시가 나지 않아도, 트로피를 받지 못해도 

참 복음을 향한 오랜 순종을 계속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키리에 엘레이손!





#Apr. 23. 2019.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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