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릴지언정 무너질 수 없는
바리새인,
그들은 율법으로 만든 집에 살고 있었다.
그들의 업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단할망정 영광스러운 일었다.
바리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과 존경을 받았으며, 매번 옳게 여겨졌던 것이다.
종교적 영향력에 있어서만큼은
다른 계파의 추종이 허락되지 않았다.
명실상부 그들은 대중적 경건의 대명사요,
경건의 일인자였다.
꾸준한 사회적 명성의 결과,
그들은 스스로를 의로운 부류로 여겼다.
나르시스의 운명이
그들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
그들은 말하자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율법의 수면에
입을 맞추다가 사단(큐피트가 아니라)이 쏜 화살을 맞고
경건의 나르시시스트들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경건의 대명사들은 자신의 명예를 당연시 했고, 나아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율법의 버전을
쉼 없이 업그레이드 시켰다.
율법은 웬만해선 지킬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까다로워져 갔고,
그러다 결국 바리새인들의 전유물로 축소되었다.
만인을 위한 하나님의 율법이 특정 부류에게
독점됨으로써 학대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율법의 대저택에도 주춧돌은 있었다.
그것은 안식일 법이었다.
안식일에는 그 무엇도 행해서는 안 된다는 법,
그것은 바리새인들에게는 목숨과도 같았다.
주춧돌이 흔들려 집이 타격을 입으면,
그들의 생존 또한 위협을 받는 까닭이었다.
떠오르는 스타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떻게 보내는지
관심을 넘은 감시, 관찰을 넘은 주시는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막 3:6)
어처구니없게도
무려 율법의 집에 살아가는 자들이었음에도
바리새인들은 살인 도모에 서슴없었다.
경건의 아들들은 살인을 성사시기 위해
세속적인 정치권력 집단인 헤롯당과 손을 잡았다.
물과 기름 같았던 자들이
예수를 죽이는 일에 한 마음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의 아킬레스건인 민심과 안식일 법을
동시에 건드렸던 까닭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는
가난한 민심을 등에 업고 국회의원이 되어
안식일 법을 개정하려고 했던 무소속 선지자였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2:1-2)
안식일은 마지막에 창조된 인간이 처음 맞이한 날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진행해 왔던 일을 멈추고 쉬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쉰다는 것은 멈춤을 의미한다.
정지를 통해 사람은 자신의 관심을
<행위>에서 <존재>로 전환한다.
본인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피조물임을 기억하고,
생명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서는
쉼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 2:27)
바리새인들의 감시와 주시 속에서도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셨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는 일을 옹호(막2:23)하셨으며,
안식일에 한쪽 손 마른 자를 고쳐(막3:5)주셨다.
먹는 것과 병을 고치는 것은 생명의 존속을 위한 일이다.
생명을 위한 행위(쉼)가 안식일의 핵심이었음으로
안식일에 생명을 위해 선한 일을
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바리새인은 안식일을 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사람 밑에 두셨던 안식일을 우상화했다.
안식일을 사람 위에 두고,
사람으로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도록 조작했다.
사악한 반전이었고, 이유는 확실했다.
자신들의 사회적 명성과 세력을
돈독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관계 매뉴얼로
사람에게 주신 율법을 우상화했다.
율법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그것을 숭배하면서 자기 유익과 만족을 추구했다.
그들의 숨겨진 음흉함을 드러내기 위해,
동시에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께서는 과감하게 그들의 안식일을 범하셨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고 지키는 일을 함으로써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점과
안식일 법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폭로하셨다.
대한민국 장로교 합동 측 교회의 예배 순서, 세례 의식,
설교, 찬양과 기도, 교회 건축, 경건 훈련 ….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도와주고,
믿음을 단단히 키워주었던 고마운 형식과 방식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 것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삶의 터전이 해외 선교지로 옮겨지면서부터
이전의 형식과 방식들은 이미 거의 멸종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그분과의 관계를 위해서 사용되었던
다양한 도구는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풍성했던 그분과의 관계가
갈수록 납작해졌던 데에는 형식과 방식의 부재가
큰 몫을 한 것 같다.
그러나 끝나서도 아니 되고,
끝날 수 없는 것이 그분과 나의 사이다.
방식과 형식이 중요하긴 해도, 그분과 내가
같이 살고 있는 집의 주춧돌이 될 수는 없다.
만일 그것이 주춧돌이었다면,
그것은 벌써 무너졌을 것이다.
특정한 방식과 눈에 보이는 형식,
그리고 틀에 박힌 의식을 신앙의 주춧돌로 삼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일이다.
그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비 오고, 바람 불고, 홍수가 나면 무너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 모래 위에 지은 집인 까닭이다.
어쩌면 바리새인들이야 말로 율법(형식과 방식)이라는
커다란 모래사장 위에 영원한 집을 지으려 했던
부류인지도 모르겠다.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미약한 내게
선교지의 낯선 환경과 문화와 종교는 압도적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도전에 나의 신앙이 흔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분과 함께 사는 집을 지킨다는 이유로
그것을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지는 않는다.
흔들거릴 때마다 매번 주춧돌을 더듬어 확인할 뿐이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우리 집의 초석(礎石)은
<말씀이신 예수>다.
그분이 신앙의 주춧돌인 한 흔들려도 문제될 것은 없다.
문화, 환경, 종교가 거세게 달려들어 신앙을 흔들어 대도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는 한
어지러워 비틀거릴지언정 쓰러질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은 나침반의 바늘은 흔들리지 않고,
갈등하지 않는 자는 시체뿐이다.
물론,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은 피곤한 일이나,
바른 방향으로 전진하려는 자에게
흔들림은 오히려 고마운 동반자다.
그리하여 선교지에서의 흔들림은 감사할 제목이다.
‘이 길이 맞을까?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을까?’
수없이 의심하고, 묻고, 갈등하면서
오늘을 살아냄에 감사한다.
그리고 단단한 주춧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안식일처럼
마음속에 버티고 있는 한
완주될 길 위에 서 있음에 감사한다.
그 일은 벌어지고야 말 것이다.
이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믿음의 상(償)이신 그분을 기어이 뵙고 말 일.
그 일이 얼굴에 미소를 그려 넣는다.
그것을 보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분이다.
이 작은 것으로도 행복해 하실 그분이다.
그분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키리에 엘레이손!
#Jan. 16. 2019.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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