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열매
“우크라이나의 농산물은 유기농뿐이다. 농약 살 돈이 없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들 중에도 뼈는 있다.
자연이 선사한 비옥한 토지와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빈곤한 경제가 절묘하게 버무려진 결과,
우크라이나의 농산물들은 어쩔 수 없이 건강하기 짝이 없다.
수도 키예프의 토지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난 가을,
동네 울타리마다 심겨진 나무들은 열매를 맺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과, 배, 포도, 호두….
담장 너머로 떨어진 열매들은 먼저 발견한 자가 임자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들짐승이나 날짐승보다
거의 매양 한 발 느린 편이었지만,
횡재할 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넉넉한 것이 키예프의 가을 열매였던 것이다.
그 집은 우리 집에서 오십 보쯤 떨어져 있었다.
커다란 밤나무를 보유하고 있었던 탓에
얼마 전 그 집 담장 밖은 북새통이었다.
나무가 자신의 탱글탱글한 열매를 아낌없이 털어내었던 것이다.
몇 주먹씩 주워올 때면 실없는 웃음이 떨어지곤 했다.
딸아이 못지않게 밤을 애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쉬이 얻은 횡재는 허망하게 사라지는 법이다.
그동안 야무지게 모아왔던 밤을 깨끗이 씻어 아낌없이 삶았다.
이윽고 우리 집 기미 상궁(?!)이 그것들 중 하나를
입속에 자신만만하게 털어 넣었다.
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구겨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얼굴 못지않게 구겨진 삶은 밤이
쓰레기통으로 신속하게 자리를 옮겼음은 물론이다.
그것이 밤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머지않아 인터넷 기사를 통해서 밝혀졌다.
<나도 밤나무>로 분류되는
마로니에 나무의 독성 가득한 열매, 그것의 정체였다.
‘열매로 알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해 볼 때,
과실수(果實樹)가 아닌 사람은 없다.
그런데 난감한 사실이 있다.
사람은 몹시 요상한 유실수(有實樹)라는 것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나
사람의 경우에는 꼭 그렇지 만은 않다.
이사야의 탄식처럼 인간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어도 최하급 들 포도를 맺을 수 있으며,
우여곡절을 좀 겪어본 자들이라면 빛 좋은 개살구가
천지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의 가지들을 이리저리 들추어 본다.
잎들 사이에 숨어있을 지도 모르는 열매들을 찾아볼 요령이다.
솔직히 모르겠다.
내가 밤나무인지 아니면 마로니에 나무인지.
딱히 열매가 보이지 않는 것도 이유겠지만,
그 보다는 고질적인 교만이 더 큰 문제일 것이다.
그것의 질긴 숨통이 끊어지지 않는 한
독한 마로니에 열매는 언제든 고소한 밤인 양
능청을 떨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밤과 닮았으나 마로니에 열매는 내가 알던 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밤이라고 단정했다.
밤을 몹시 먹고 싶은 마음이 우크라이나의 것이라서
생긴 것이 조금 다를 뿐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마로니에 열매를 밤으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이 때, 어리석은 추측을 기정사실화 한 것은
내 생각이 틀릴 리 없다는 교만이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누군가의 입속을 끔찍하게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적발되는 교만의 실체.
그러므로 열매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다.
그것이 유사 열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가장한 집착, 희락을 가장한 쾌락, 화평을 가장한 문제 회피,
오래 참음을 가장한 게으름, 자비를 가장한 표면적 친절,
양선을 가장한 명예욕, 충성을 가장한 업적주의,
온유를 가장한 가벼운 호의, 절제를 가장한 자기혐오….
밤과 유사하다고 해도 마로니에 열매는 결코 밤이 아니다.
포도와 유사한 열매는 포도일 수 없으며,
무화과 열매와 엇비슷한 것 역시 무화과 열매일 수 없다.
과수원 주인이 그런 유사 열매를 기뻐할 리 없다.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고 배나무에서 배를 딸 때,
그분은 비로소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열매를 맺었다고 뿌듯해할 일은 아니다.
그것이 진짜 열매인지 유사 열매인지를 겸손히 확인해야 한다.
과수원 주인의 말씀과
그분의 과수원에 함께 심겨진 동료 나무들과
열매를 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그분의 영을 통해
면밀히 살피고 감찰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선교지 우크라이나가 서서히 겨울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거대한 추위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면서 저 멀리서 포효한다.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길고도 지루한 겨울을 경험할 판이다.
마지막 잎까지 모조리 털어버린 나무들을 바라본다.
열매는커녕 꽃 한 송이 잎 하나가 없는 내가 그들과 함께 서있다.
앙상한 가지들이 작은 바람에도 흠씬 흔들거린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나의 뿌리는 단단한 흙을 붙드느라 안간 힘을 쓴다.
예수, 그분 외에는 내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갈수록 오롯해지는 중이다.
찬란한 봄은 오고야 말 것이지만,
아직은 그것을 소망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예수, 곧 과수원 주인을 더욱 꽉 붙드는 것 외에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렇게 유사 열매가 아니라 참 열매를 위해서
나는 그분의 말씀을 애써 붙든다.
매번 자기 뜻대로 살고 싶은 나를 부인하면서!
#Nov. 19. 2017.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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