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테루의 책, 「환상의 빛」을 읽고.
작가는 죽음에 천착하고 있다.
표제작 ‘환상의 빛’을 비롯하여
나머지 작품들인 ‘밤 벚꽃’, ‘박쥐’, ‘침대차’ 모두
죽음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표제작은 발가벗은 채 죽음에 덤벼들었고,
나머지 작품들은 역시 다소 소극적이긴 하나
죽음에게 은근한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작품들은 죽음(혹은 죽음 이후의 삶, 내세)이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거절한다.
도리어 삶으로 죽음을 설명하려고 든다.
이 땅에서의 삶이
유일한 삶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작품 속 인물들에게 죽음은 삶의 끝으로,
마치 벚꽃이 피었다 지는 것처럼 퍽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상책은 그것을 잊는 것이다.
자살한 이유를 망자에게 끝도 없이 물으면서,
낯선 신혼부부와 밤 벚꽃 끝물을 나누면서,
혼외 관계의 쾌락을 추구하면서,
그리고 계약 성사를 위해 바쁘게 침대차에 몸을 맡기면서
그들은 죽음을 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쉬이 잊을 수는 없다.
부고(訃告)가 일상의 목덜미를 집요하게 물어뜯는 것이다.
뱀파이어 같은 부고 앞에서 인물들은
망자에 대한 기억을 플래시백을 통해
생생하게 소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누구도 삶으로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
이승과 저승은 완전한 남남이기 때문이다.
결국, 산자에게 죽음은 이해할 수 없으나
실재하는 환상의 빛, 곧 신비로 설명되어질 뿐이다.
개인적으로 「환상의 빛」의 미야모토 테루는
세속주의 사제로 보인다.
정교한 멜랑콜리 언어로 죽음을 미움의 대상이 아닌,
화해의 대상으로 변신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세속주의의 아이들이 즐거워할 만한 작품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함께 즐거워할 수만은 없었다.
기독교인인 내게 죽음은 화해의 대상이 아니라
화해불가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죽음과의 화해가 아니다.
기독교는 죽음의 계시다.
기독교가 죽음의 계신인 것은
기독교가 생명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그 계시 되는 생명이란 바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생명으로 계시되기에,
기독교의 선포에 있어서 죽음은 설명되어야 할
“신비”가 아니라 멸망당한 원수다.
종교와 세속주의는 죽음을 설명함으로써
죽음에게 어떤 “지위”, 어떤 근거를 주며,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죽음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따라서 참으로 끔찍한 무엇으로 선언한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알렉산더 슈메만, 복 있는 사람) 중에서
읽는 중에 느닷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것은 차라리 구토물에 가까웠다.
슬픔에 절은 간간한 문장들이 명치끝에 얹혔다가
일순간 게워진 것이었다.
흐느낌의 피스톤이 배꼽에서부터 위를 향하여
수차례 움직였다.
펌프질을 따라 한 동안 복받쳐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다 일순간 울음이 끊어졌다.
티슈로 눈물을 말끔히 닦아내자 민망함이 번졌다.
작가의 문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Mar. 16. 2016.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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