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신비와 저항

창고지기들 2016. 3. 15. 17:54






도로테 죌레의 책, 「신비와 저항」을 읽고.



‘신비주의의 민주화를 위하여!’


책의 목적이 아이러니했다.

목적의 상실, 곧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신비주의를

목적을 가지고 소개한다는 것이 재밌게 느껴졌다.

독서를 시작하면서 바랬던 것은 신비주의에 대해

다만 몇 마디라도 새로운 말을 배우는 것이었다.

배우는 과정이 늘 즐거울 수만은 없는 법이지만,

450페이지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잡아먹자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피곤이 꾸역꾸역 젖어들었다.



나의 전통 서방신학은 어거스틴을 가부장으로 모신다.

그는 창조론 보다 구원론에 치중했고,

이것은 근대 자유주의를 넘어오면서

결국 개인 구원으로 축소되었다.

자연스럽게 인간은 죄인으로 치부되었고,

자연은 형제 피조물이 아니라

갈취하고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구원 역시 예정론의 오용으로 모든 사람이 아니라

예약된 특별한 손님을 위한 것으로 축소되었다.

그렇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교권주의 아래서

서방신학은 축소에 축소를 거듭해왔다.

그것이 변방의 여성인 내게 뭔가 석연치 않고,

받아들이기 벅찬 것임은 당연했다.



이러한 주변의 자리(신비주의)가

제의적 권력의 핵심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여성들에 의하여

선호 되던 장소라는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닌 것이다. …

기독교 신비주의의 영역을 차지하는 다수는 여성들이었다.

-본서 중에서



내가 속한 교단은 여성들에게

강단권(설교권)과 의결권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런 교단에 속한 것은 결코 내 의지가 아니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은 그냥 주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의 관심이

신비주의로 흘러가는 것은 퍽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마치 강이 바다로 흘러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처럼 말이다.



신비주의는 창조론에 뿌리를 둔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가능한, 신비적 존재인 것이다.

이 때 예외는 없다. 모든 인간이 신비주의자가 될 수 있다.

신비주의 안에서 창조된 자연은 형제 피조물로 존중되며,

하나님과의 긴밀한 연결 속에서 모든 피조물은 전체성을 갖는다.

개인주의, 독립성, 분리와 같은 단어는 신비주의 사전에 없다.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며,

우리는 그들이고, 그들이 우리인 것이다.

상호 연결성, 종속성만이 풍성할 뿐이다.

함께 즐겁지 않으면 기쁜 것이 없고,

누군가 고통스럽게 울면 모두가 비통하고 아플 뿐이다.

이처럼 신비주의는 상호 관계를 통한

종속성과 공동체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를 골방에서 황홀경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하려는 변태적 성향으로 치부하는 것은 왜곡된 견해일 뿐이다.

도리어 그것은 골방에서의 기도 후에,

골방을 뛰쳐나가 저항을 하는 것이다.



저항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세 가지 힘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다.

세 가지 힘이란 자아, 소유, 그리고 폭력이다.

세상은 사회가 만들어낸 가짜 자아

(광고의 모델들처럼 성공적이고, 매력적이고, 아름다우며, 지적인)를

개인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소비주의를 조장한다.

결과적으로 더 근사한 자아를 원하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소유자들은 자기 소유를 지키기 위해

경비원과 무기 등 폭력을 증대시킨다.

반면, 신비주의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연합을 통하여

자아 상실, 소유 상실, 그리고 폭력의 해체를 추구하며 저항한다.

이 때 신비주의자들은 홀로 저항하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된 형제와 자매와 함께 연대하여 저항하며,

동시에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원형을 그리워하며 애통해 한다.



우리의 행함이 우리의 온전한 자아가 되지 못하며,

단지 우리 자신의 일부가 입 맞추고, 마시고,

일하며 웃거나 혹은 명상하는 것 가운데

우리는 항상 현존하지 않으며

이러한 상황은 아주 자연스럽게 되어버렸다. …

우리가 사무실과 가정생활, 직장에서 “행하는” 것은

전혀 우리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소외되어 있어서 이러한 하나 됨이란

기껏해야 휴식 시간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

“나는 완전한 귀이다”라는 것은

우리의 힘의 모음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표현법이다.

언제 우리는 온전한 눈, 온전한 입, 온전한 손,

온전한 몸과 영혼인 내가 될 것인가?

-본서 중에서



꽤 오래전부터 나는 아이들처럼 놀지 못했다.

노는 능력을 잃어버린 내가 하는 일이라곤 고작

노는 아이들을 바라는 것뿐이었다.

아마도 삶이 조각나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놀 수 없게 된 후로 기억은 너덜너덜 헤지고,

하루 24시간 중 실제로 내가 사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어 이젠 채 몇 시간도 되지 않는 듯하다.

C .S. 루이스의 신비주의적 명언

“나의 행위가 나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내게 좌절감을 안겨준다.

어린 시절에 가능했던 무아경은 종적을 감췄고,

나는 나의 능력 없음에 망연자실 할 뿐이다.

그러나 도움은 숨은 그림처럼 늘 가까운 곳에 있다.

눈을 크게 뜨고 주목하면서 유념하여 본다면,

그래서 숨소리 하나에 까지 주의를 기울이다보면,

나는 다시 놀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재활에는 힘겨운 연습과 훈련이 따를 것이다.



멜랑콜리는 사탄이 뿌려놓은 영혼 안에 있는 먼지다.

걱정과 고뇌는 모든 악마적 힘들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우울함은 악마적 속성이고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다. …

한탄하는 것은 찬양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그것을 하기 위하여 어려운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

기도하고, 노래하고, 찬송하고, 춤을 추는 것,

이것이 슬픔에 맞서는

그(기쁨이 육화된 삶을 살았던 아씨시의 프란시스)의 투쟁 수단이었다.

-본서 중에서



무엇을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 안에서 기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기쁨의 근원 안에서 해일처럼 덮쳐오는 슬픔과 역경을 뚫고

기뻐할 줄 아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슬픔에 맞서 투쟁했던

기쁨의 용사였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가난이라는 신부와 결혼한 그의 평생이

얼마나 자유롭고 기쁨으로 가득했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 왠지 서글퍼진다.



교의적인 것과 다른 기독교의 예전적 전통은

자연을 거부하지 않고 신성시한다.

그리스도는 빵과 포도주에 몸과 피로 현존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부터 생겨난 오늘날의 많은 예전들은

창조를 우주적인 하나님의 몸으로 이해한다.

새롭고, 예전적으로 특징지어진 경건성이 형성되어지는 것이다. …

빵과 물과 우리의 몸과 우리의 무생물적 자매와 형제들과

에너지들과 우주 자체와 성례전적으로 관계하는 것은

인간의 지배를 벗어난 심연으로부터 성장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본서 중에서



남편이 예배학을 전공한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와의 대화에서 답답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예전이 구원론과 함께 창조론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학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을 통해 창조론의 언어들이 쏟아지길 기대한다.

많은 성도들이 그것을 배움으로써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신비를 누리길 소망해 본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언어로 보면,

“예수를 그 집에 머물게 하고 항상 함께 하고자 하려면,

마리아와 마르다는 함께하여야 한다는 내 생각을 믿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예수를 극진히 대접할 수 없었을 테고

먹을 음식도 대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본서 중에서



마리아를 편애하는 가부장적 교권주의자들에게

아빌라의 테라사의 말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닐 것이다.

스스로 마리아로 자청하면서 우위를 점하려는 그들은

정작 수많은 마르다가 해주는 밥 없이는 살지 못한다.

영지주의자들이 지식만 추구할 뿐,

그리스도와 같은 봉사와 헌신과 희생을 못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마틴 부버는 “성공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

나를 놓아준다는 것은 성공에 대한 압박감을 떨쳐버리는 것을 뜻한다.

즉 “네가 아무 것도 아닌 곳으로 가라”라는 뜻이다. …

그러나 저항적이고 연대적인 행동에 참여하는

마지막 기준은 성공이 아니다.

즉 이 세계의 지배자의 노랫가락에 맞추어 춤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즉 성공과 진리의 관계를 수정하는 것을 뜻한다. …

나를 놓아버린다는 것은 진리를 성공에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성공을 마지막 범주로 여기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본서 중에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도, 시몬느 베이유도,

알버트 슈바이처도 모두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곳으로 갔다.

비트겐슈타인은 고등학교로 갔고, 베이유는 공장으로 갔으며,

슈바이처는 아프리카로 갔다.

성공과 진리의 관계를 수정한 후,

성공이 아니라 진리에게로 다가갔던 것이다.

그러자 자유가 그들을 따라나섰다.

감사하게도 나는 지금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곳에 있다.

뭐라도 되는 양, 혹은 뭐라도 될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했던

성공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세력을 잃어가는 중이다.

언제 들어왔는지 호주머니 속에 손톱만한 자유가 생겼다.



책속엔 받을 만한 말이 정말 많았다.

그러나 받지 못할 말들도 있었다.

아직 받을 준비가 되지 못했거나,

아예 처음부터 받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관계의 상호 종속성과 신비주의의 전체성에 대해서

살짝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말하는 언어를 갈망하게 되었다.

결국 신비적 삶의 동사인 기도의 초대에

더욱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기도를 통해 더욱 하나님을 그리워할 수 있기를,

이웃을 위한 고난이 점점 더 성숙하기를,

그리고 동기나 목적 없는 기쁨과 환희로 춤 출 수 있기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부르는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머리에 왕관을 얹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에게 왕관을 씌우는 행위이며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본서 중에서




#Feb. 24. 2016.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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