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퐁스 도데의 책, <별>을 읽고.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아기나 된 행동한다. 침대에 누워서 손을 쥐었다 펴는 잼잼잼을 하는 것이다. 갱년기를 맞은 나의 악력(握力)이 밤사이 재빨리 휘발되는 탓이다. 잼잼잼은 일종의 마중물이다. 흩어졌던 힘을 다시 모아볼 요량으로 하는 잼잼잼은 첫 펌프질처럼 뻑뻑하고 힘에 부친다. 그러나 이윽고 몇 번을 반복하고 나면, 부드러운 힘이 손아귀를 적시고 만다.
악력이 그 모양이니 손목의 힘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일까? 두꺼운 책은 갈수록 부담스럽다. 책 구입에 앞서 페이지 수를 감안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물론, 책 받침대에 앉혀 보면 될 일이지만, 그것은 책과 거리를 둔 채 정색하고 읽는 독서의 한 행위일 뿐이다. 가볍게 손에 들고 책의 감촉을 흠뻑 느끼면서 읽고 싶은 것도 독자의 자연스러운 욕구다. 그런 점에서 미니북은 호락호락하다.
요즘 서점에 가면 미니북을 파는 가판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아기자기한 크기의 책들을 저렴한 값에 골라 담는 재미를 선사해주는데, 손목력(?!)과 악력이 부족한 나로선 손안에 들어오는 만만한 중량의 책을 구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알퐁스 도데의 <별>은 그런 미니북들 중 하나다. 제주도의 한 카페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해 보니 알퐁스 도데의 소설은 ‘별’ 외에는 읽어본 것이 없었다. 작고 가벼운 책은 읽는 내내 손 안에서 작은 별처럼 귀엽고 사랑스런 촉감을 선사해 주었다.
책은 ‘별’을 필두로 총 25개의 엽편 소설들로 구성되었다. 그것들은 마치 카페 라떼처럼 부드러운 프로방스의 목가적 정취와 파리의 시민 혁명과 전쟁이 일으킨 씁쓸한 정취를 한 데 뒤섞고 있었다. 그와 같은 정취는 사연, 전설, 우화, 편지 등의 형식에 담겨서, 보여주기 보다는 들려주기 방식으로 전달되었다. 현대의 보여주기 소설들에 비해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들려주기 전통에서 자란 관계로 그것이 내겐 더 익숙하니까.
책속의 짧은 소설들이 일면, 어쿠스틱 정규 앨범처럼 들리기도 했다. 어떤 트랙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할 법한 평생 잊을 수 없는 마법 같은 순간을 엿보게 해주었고, 어떤 트랙은 전부를 걸어버린 매혹당한 순수의 결국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또 어떤 트랙은 갑자기 혹은 기어이 들이닥친 마지막 순간에 대한 회한을, 또 다른 것은 산업의 발달에 따라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신비의 가련한 신세와 혁명이 파괴한 일상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슬픈지를 감상하게 해주었다.
“가지 말거라. 대륙은 몹시 춥단다. 겨울이 되면 넌 얼어 죽을 거야.”
하지만 소녀는 겨울이란 말 자체를 믿지 않았고, 추위는 그저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느낄 수 있는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녀는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본서, <겨울> 중에서
결국 소녀는 죽었고, 그녀의 무덤은 마침 내 마음 속에도 있었다. 철이 없으나, 아니 철이 없어서 예쁘고 사랑스럽던 소녀가 가엾고 그리워서 오늘도 비가 내리나 보다. 나는 우산을 받쳐 들고 하염없이 걷는다. 뙤약볕의 패서디나를 뒤로 하고, 키암부 길거리의 진흙탕을 걸으면서 소녀를 비틀거리며 애도한다.
#Jul. 17. 2023.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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