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피터슨의 책, <하나님께 응답하는 기도>를 읽고.
인간의 많은 특징 중 하나는 도구를 사용하고 제작할 줄 안다는 것이다. 도구란 어떤 일을 할 때 쓰는 연장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도구는 흔히 물리적 특성을 가진 사물로 제한되기 쉽다. 이 책 <응답하는 기도>는 분명히 도구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그것은 물리적 도구가 아닌 영적 도구를 다루고 있다.
저자 유진 피터슨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와 기도를 연결시키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즉, 기도를 언어로 이루어진 도구로 보고, 도구인 기도의 매뉴얼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는 어떤 도구인가? 그것은 주체인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뚝딱 만들어내는데 사용되는 물리적인 도구와 다르다. 기도는 영적인 도구로써 영적인 주체인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언어로 응답(자기 생각과 감정과 욕구를 표현하는 심리적 용도의 언어가 아니라!)하는데 사용하는 도구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도라는 도구를 잘 사용할 때, 우리 인간은 비로소 인간답게 존재하고, 또한 존재로 변화될 수 있다.
기도에는 물리적 도구 못지않게 다양한 종류와 쓰임새와 사용 방법이 있다. 그래서 저자는 방대한 기도의 영역 중에서 ‘시편의 기도’를 바운더리로 삼아 그 안에서 일련의 기도의 매뉴얼을 제공하고자 한다. 그가 제공하는 주옥같은 시편 기도의 매뉴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시편 기도의 성전에는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가 있다. 시편 기도의 양대 기둥은 각각 시편 1편과 2편이 맡고 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편 1편의 나무와 시편 2편의 메시아가 그것이다. 나무는 산만하고, 시끄럽고, 추상적인 세상에서 기도하는 일이란 나무 앞에 앉아 집중하고 구체화하는 행위임을 가르쳐 준다. 메시아는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세상에서 기도하는 일이란 메시야 앞에 앉아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
2. 시편 기도의 언어는 제 1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제 1 언어는 개인적인 친밀함의 언어다. 처음 말을 배울 때 배우는 언어가 바로 제 1 언어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점점 친숙해 지는 언어는 학교의 언어, 곧 정보의 언어인 제 2 언어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가게 되면 제 3의 언어, 곧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정치의 언어를 배워야만 한다. 시편 기도의 언어는 존재를 표현하고 존재를 실현하는 언어이며,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언어(제 2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언어이다. 그래서 시편의 언어는 자기감정을 불편할 정도로 완전히 노출한다.
3. 시편 기도는 언제나 특정한 정황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기도 안에는 이야기가 존재하며, 독백보다는 대화가 주를 이룬다. 이것이 성경을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책으로만 대하는 자들로 하여금 시편을 불편하게 느껴지게 하는 이유다.(이런 부류의 자들은 서신서 한 면을 붙들고 강박적으로 물고 늘어지면서, 그것이 마치 성경 전체의 진리를 대변하는 양 주장한다. 그들의 궁핍한 언어는 안타까움을 넘어서 가여울 지경이다.)
성경은 정보 제공용 자료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경을 통해 일하신다. 성경의 이야기에 독자를 끌어들여 참여시키신다. 성경의 이야기 속에서 독자는 하나님의 단어와 문장과 구문을 익히면서 하나님의 언어에 자유롭게 반응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쌓아간다.
4. 시편 기도에는 일정한 리듬이 있다. 아침과 저녁, 소리와 침묵이 시편 기도에는 절묘하게 함께 공존한다. 또한 시편 기도는 은유로 가득하다. 은유는 영과 물질이 일치하는 언어를 보여주는 것이며, 죄로 인해 갈라져버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은 이 은유를 통해 하나가 된다.
특별히 시편의 은유는 물질적인 것을 경멸하고, 은밀한 것을 갈망하는 영지주의에 엑스 표를 긋는다. 성경의 진리를 모조리 비물질화 시키려는 영지주의의 독성에 물질적이고 세련되지 못한 은유는 시원한 해독제를 제공해준다. 시편의 은유를 통해서 평범한 물질, 예를 들면 방패, 반석, 어머니, 화살, 젖과 같은 물질과 평범한 행동들은 존중과 관심의 대상이 된다. 또한 은유는 흔한 것들에서 시작하여 확장과 연계를 통해 측량할 수 없는 영광으로 나아가게(크레센도) 한다. 반면, 우상은 신비에서 시작하여 축소와 제한을 통해 측정될 수 있는 무언가로 요약(디크레센도)하게 한다. 적절한 은유의 사용으로 우상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5. 시편 기도는 공동체의 기도 즉, 예배다. 개인이 모여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에 의해 개인이 형성되는 것이다. 공간, 장소, 순서라는 예전 형식은 감정에 따라 좌우되는 개인주의 기도의 폐단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진행자의 기도 인도와 지체들과 같이 부르는 찬양을 통해서 자기중심적인 기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6. 시편 기도는 도덕주의 함양을 훈련시키는 대신에 악과 씨름하도록 훈련시킨다. 그러므로 시편은 상처와 미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과 경험마저 마중물로 삼아 기도로 정진할 수 있도록 인도해준다. 또한 시편 기도는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내가 아니라, 실제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이 기도하게 도와준다. 그 결과가 원수를 멸해달라는 기도다. 게다가 기도는 기도자로 하여금 진정한 적을 구별하게 해주고, 주적에 대항하여 타협이 아니라 전쟁을 선포하면서 악과 씨름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한다.
7. 시편 기도는 너저분한 일상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지 않는다. 대신에 일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한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당하든지 그것을 기도 안에 놓을 때, 그것은 받아들여지고 그것에 드리워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한다. 그렇게 기도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도록 훈련하게 하며,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게 해주는 영적 도구다.
8. 헤르만 궁켈에 따르면 ‘불평의 기도’야 말로 시편의 척추다. 그러나 어떤 시편도 불평으로 일관하다 끝나는 것은 없다. 모든 기도는 충분하기만 하면 언제나 찬양이 된다. 찬양이란 곧 기쁨을 의미한다. 즉, 충분하기만 하면 기도는 찬양할 수 없을 때 찬양하게 하게하고, 기뻐할 수 없을 때 기뻐하게 한다.
책을 통해서 특별히 영지주의를 경계해야 함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지적인 허영과 열망이 여전한 까닭이다. 영지주의자들의 말과 태도는 대체로 교양 있고 공손하다. 그래서 현혹되기 쉽다. 이력(선택)과 행동을 파악하기 전에 섣불리 빠져드는 것은 어리석다. 흐음.
한창 학업 중이라 나의 일상은 하는 수 없이 제 2 언어로 충만하다.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기에 온전할 수 없는 언어생활이다. 건강을 위해 친밀한 제 1 언어를 함양시킬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친밀한 언어로 함께 기도하는 기도의 공동체를 만나기를, 그리고 문득 시심(詩心)이 도착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구하며 마친다. 키리에 엘레이손!
#Jun. 3. 2023.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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