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두려워하지 않기
그 때 나는 마치 책사(策士)나 된 듯 했다.
그녀가 나를 그리 대우했던 것이다.
한껏 고양된 나는 나의 식견들을 모조리 내어주었다.
그것이 전폭적으로 반영될 것이라는 기대는
거의 기정사실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얼마 후,
그것은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나의 의견들은 소각장의 연기로 사라졌고,
모든 일들은 오로지 그녀의 소견을 따라
진행되어져 갔다.
‘결국 이럴 거면서, 대체 왜 물어본 거야?’
무시당했다는 모멸감은 마음속에 화를 지폈고,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불길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생각이 어느 지점에 가닿자
순식간에 불길이 잡혔던 것이다.
‘내 말대로 할 의무가 그녀에게 있는 건 아니잖아?
문제는 뭐라도 된 듯 우쭐했던
나의 태도에 있었던 거야!’
그 뒤로 그녀가 내게 원했던 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확증해주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일을 교훈으로 삼은 후,
누군가가 의견을 물어올 때마다
나는 단서를 부치게 되었다.
“내 말이 옳은지 그른지는
나도 잘 모겠는데, 제 생각에는 ….
들을 건지 말 건지는 당신이 판단할 일이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물론, 이와 같은 단서는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을 보호하는
안전장치 역할을 충실히 해오고 있다.
바벨론 왕이 세운 총독 그다랴가 암살된 직후,
요하난과 여사냐 및 유다 백성들은
이집트로의 망명에 뜻을 모았다.
바벨론 왕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되어
선택한 결정이었다.
그런 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았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렘42:3)
정황상 그들이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자기 뜻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을 원했던 것이다.
물론, 언제나 그랬듯이
하나님의 뜻은 그들의 것과는 달랐고,
언제나 그래왔듯이 백성들 또한
유다 땅에 머물러 있으라는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이집트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물론, 하나님도 예레미야도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진심으로 대답해주시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비록 확실한 자기 뜻을 정하지는 못했어도,
바벨론 왕에 대한 두려움으로 막막하기로는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나다.
해외 선교지라는
친숙한(?!) 리빙 텍스트(Living Text)를 떠나
낯선(!) 고국에 돌아온 상황 속에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어떤 길로 나아가야할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나의 첫 번째 바벨론 왕은 물가(物價)였다.
그것은 내게 거의 아낙 족속과 같아서
그 앞에서 나는 메뚜기와 다름이 없었다.
그동안 잠깐씩 방문할 때는 미처 몰랐었는데,
막상 일상으로 받아들이자
거인인 아낙 족속 같은 물가는
나를 한손으로 들어 바닥에 내리 꽂았다.
“어서 와, 한국 생활은 18년 만이지?!
어때? 우크라이나와는 완전히 다르지?”
두 번째 바벨론 왕은 학교생활을 접고
집에서 홈스쿨링을 해야 하는 아이의 상황이었다.
자신의 터전에서 뿌리 뽑힌 뒤,
홀로 외롭게 학업에 정진하면서
보통 아이들과 다르게 살아가야 하는 아이의 현실이
미안하고도 두려웠던 것이다.
세 번째 바벨론 왕은 가족과 친척과의 관계였다.
그동안은 해외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온갖 집안 행사에서 항상 열외였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복잡하고 쉽지 않은 친지들과의 관계가
부쩍 부담으로 다가오는 중이다.
네 번째 바벨론 왕은 건강이다.
찬바람이 들기 시작하면서
어지럼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속도 메슥거리고 컨디션도 자주 나빠졌다.
하루 종일 누워있으면서 무기력증은 더해져만 가고,
이렇게 평생 지내야하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주변을 맴돌았다.
이렇듯 강대한 바벨론 왕들의 득세로
나는 잔뜩 움츠러든 채 주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내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러자 주님은 자신의 성품대로 진심을 다해 말씀해주셨다.
Do not be afraid of the king of Babylon,
whom you now fear.
Do not be afraid of him, declares the Lord,
for I am with you and will save you
and deliver you from his hands.
(렘 42:11)
네가 할 일은 오직 하나,
지금 네가 두려워하고 있는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믿는 것과 동전의 양면이지.
나만 믿어,
내가 너와 함께 있고,
너를 구원할 것이며,
바벨론 왕의 손에서 너를 구해낼 것을 믿어.
그것이 곧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크리스천이 되었지만,
몹시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고질적인 지병들 중 하나는 불신이다.
어설프게 믿어서 고난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두렵게 만드는 바벨론 왕이야
항상 도사리고 있는 것인데,
믿지 못해 늘 이집트로 도망치려는 것이
나의 민망한 상태인 것이다.
믿기만 하면, 온전히 믿기만 하면,
광야에서도 배불리 먹이셨던 그분의 신실함으로
아낙 족속 같은 물가도 얌전한 고양이가 되고,
홈스쿨링 하는 아이도
독특하고도 행복한 한 시절을 누리게 되며,
친척들과도 관계의 기쁨과 부요함을 누릴 수 있으며,
육체적 연약함 중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친밀히 경험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데 말이다.
믿음의 여정은
일절 새롭고도 평탄치 않은 길들의 연속이다.
역 문화충격으로
뒤로 달리는 기차를 탄 것 같은 메스꺼움이 끊이질 않는다.
그래서 자주 질끈 눈을 감으면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그분의 손을 꼭 붙들고
어디든 무사히 도착하기만은 소망하며
믿는 중이다.
두려워하지 않으려는 중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Oct. 10. 2020.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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