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창고지기들 2020. 10. 3. 10:18

 

 

 

 

루이스 세뿔베다의 책,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를 읽고.

 

 


‘세뿔베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어디였더라? 아~ 세풀베다 블러바드!’

 


그것은 미국 LA에 살 때,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곤 했던 길 이름이었다. 

그 곳은 일찍이 라티노들의 땅이었던 까닭에, 

스페니쉬 이름표를 단 길들이 심심찮았다. 

아무튼, 이번에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이름의 세뿔베다 씨의 동화를 읽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는 마르께스와 보르헤스 등의 

기라성 같은 라틴 작가들의 뒤를 잇는 

포스트 붐 세대의 주목할 만한 작가였다.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속에는 

대다수 이야기들이 의례 그러하듯이 빌런이 등장한다. 

그것은 고양이가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주어야만 했던 배경, 

곧 훼손된 자연 환경인데,

물론 그것의 주범은 호모 사피엔스다. 

재밌는 사실은 갈매기가 날아오를 수 있도록 

실제적인 도움을 준 것도 

호모 사피엔스(시인)라는 것이다. 

일종의 병 주고 약 주고 테마인데, 

갈매기 무리 안에 있었으면 아무 것도 아닌 비행법이

고양이 무리 안에서는 대단한 미션이 되는 해프닝이 

적잖이 의미심장했다.

 


책은 

환경, 수용, 연대, 의리와 신의, 책임과 희생 등 

아름다운 덕들이 난무했고, 

해서 독서는 밝고, 가볍고, 편안했다. 

고양이 각각의 캐릭터들이 뚜렷해서 흥겨웠고, 

백과사전적 지식과 실제적 기술의 차이, 

곧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몰라 

허우적거리는 고양이들의 모습이 재미를 더해주었으며, 

스스로를 고양이라고 생각한 

어린 갈매기의 정체성 혼란이 웃기면서도 안쓰러웠고, 

새끼 갈매기의 엄마가 된 수컷 고양이 소르바스의 마더링과 

서로 같이 육아에 참여하여 공동 육아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던 

고양이 그룹이 사랑스러웠으며, 

시인 특유의 유연한 사고와 

명쾌한 문제 해결이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우리들은 네게 많은 애정을 쏟으며 돌봐왔지. 

그렇지만 너를 고양이처럼 만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단다. 

우리들은 그냥 너를 사랑하는 거야. 

네가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 

우리들은 네 친구이자, 가족이야. 

우리들은 너 때문에 많은 자부심을 가지게 됐고,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도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우린 우리와는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아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지. 

우리와 같은 존재를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야. 

하지만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런데 너는 그것을 깨닫게 했어. 

너는 갈매기야. 

그러니 갈매기들의 운명을 따라야지. 

너는 하늘을 날아야 해. 

아포르뚜나다, 네가 날 수 있을 때, 

너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네가 우리에게 가지는 감정과 

우리가 네게 가지는 애정이 

더욱 깊고 아름다워질 거란다. 

그것이 서로 다른 존재들끼리의 

진정한 애정이지.” 

-본서 중 소르바스의 말

 


내러티브를 끌고 가는 힘은 

고양이들의 캐릭터, 즉 약속(갈매기 알을 먹지 않고 

부화시켜 아기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겠다는)에 대한 

신실함에 있다. 

그 신실함이 고양이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종류인 아기 갈매기 아포르뚜나다를 

사랑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한다. 

다름이 주는 것은 분명 불편한 구석이 많다. 

그러나 동시에 그 다름은 풍성함을 생산하는데, 

그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어린 갈매기를 수용하여 키워냄으로써 고양이들은 

그와 함께 하늘과 하늘을 나는 것의 의미를 추구하게 되었고, 

해서 그들은 하늘을 품은 비범한 고양이들이 되었다. 

다름 사이에 놓은 관계의 다리를 통해 

그들의 세계가 넓어지고 유연해지고 

심지어 아름다워지게 된 것이다.

 


“아포르뚜나다, 너는 틀림없이 날 수 있어. 

숨을 크게 쉬거라. 빗물을 몸으로 느껴봐. 그냥 물이란다. 

너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 때문에 행복을 느낄 거야. 

어떤 때는 물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때는 바람이라는 것이, 

또 어떤 때는 태양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란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비가 내린 다음에 찾아오는 것들이지. 

일종의 보상처럼 말이야. 

그러니 자, 이제 비를 온몸으로 느껴봐. 

날개를 쫙 펴고서 말이지.” 

-본서 중, 소르바스의 말

 


결정적 순간에 검은 고양이 소르바스는 

시인 베르나르도 아트사가의 시 ‘갈매기들’을 나름대로 번역하여 

첫 비행을 코앞에 둔 빗속의 아기 갈매기에게 들려준다.

 


그의 작은 용기는
곡예사들의 그것과 같기에
늘 비를 가져오고
늘 해를 몰고 오는
저 어리석은 비 때문에
그토록 한숨을 쉬지는 않지요
-본서 중, 베르나르도 아트사가의 시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내 눈에 이 시는 부활 신앙이라는 보석이 박힌 

반짝이는 반지처럼 보인다. 

십자가의 죽음 없는 부활이 없듯이, 

비 없는 바람과 태양이 없다는 것을 

고양이와 갈매기와 시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비로 인하여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는 대신에, 

오히려 한껏 숨을 들이마신 후 비행을 시도하는 것일 테다.

 


최근에 하영양이 생에 첫 연애를 시작했다. 

소르바스와 아포르뚜나다가 사랑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더욱 기도하게 된다. 

그들 사이의 다름이 불편함 너머의 풍성함을 허락해 주길, 

관계 사이에 내리는 비를 슬기롭게 견뎌냄으로 

해와 바람을 흠뻑 누리게 되기를 

어미로서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키리에 엘레이손!




#Oct. 3. 2020.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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