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메고 가는 사람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이제 막 출시된 신형 자동차였다.
40년이라는 지난한 테스트 과정을 무사히 마친 자동차는
가나안 거친 도로를 가로 질러 무한질주를 할 참이었다.
천천히 시동을 건 이스라엘은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기 전에
백미러와 사이드 미러를 조정했다.
안전하게 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눈높이에 맞출 필요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들에게 신명기는 그런 책이었다.
백미러와 사이드 미러와 같이 뒤에 남겨진
지나온 길을 바라봄으로써
앞으로 무사히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기억의 책인 것이다.
신명기의 두 주인공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다.
책은 두 주인공의 출애굽부터
가나안 입성 전까지의 여정을 기록하되,
주로 광야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광야를 배경으로 두 주인공은 서로 다투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면서
관계의 질서를 만들어 실천해왔다.
관계의 질서란 다름 아닌 율법이다.
두 주인공은 마침내 한 마음으로 율법에 헌신함으로써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
율법을 매개로 그들은 떨어질 수 없는
환상의 커플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신10:1)
율법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두 돌판이라는 구체적 물건으로 형상화되었다.
이는 어리석은 이스라엘을 위한 여호와의 배려였다.
여호와는 두 돌판으로 자신의 임재를 보증했고,
이스라엘은 두 돌판을 통해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기억했다.
그리하여 두 돌판은 이스라엘의 정중앙에 자리 잡아야 했고,
이스라엘과 함께 다녀야 했다.
여호와께서 돌판을 보관할 수 있는
이동용 궤를 만들라고 명하신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서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니라
(신10:8)
모세가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 두 돌판을 준비할 때,
나무궤 하나가 추가되었다.
그것은 두 번째 돌판을 넣어 보관하는 용이었다.
산 위에서 모세를 다신 만난 여호와는
첫 번째 돌판에 새긴 내용과 똑같은 것을 두 번째 돌판에 쓰셨다.
모세는 그것을 가지고 내려와 궤에 넣었다.
그렇게 궤는 두 번째 돌판, 곧 기억을 담는 가방이 되었다.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에도 동일한 말씀을 적어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자하심,
첫 번째 말씀을 깨뜨린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죄악이라는
기억이 궤 안에 담겼던 것이다.
기억이 담긴 궤는 새로운 사역을 창출해냈다.
광야의 시절 동안 그것을 메고 다니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레위인에게 맡겨졌다.
그렇게 레위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기억을 메고 하나님을 따라나섰다.
레위인들 중에 내가 있다.
땅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업으로 받았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레위라 생각한지 오래다.
그런 내가 하는 일은 증언하는 것이다.
이는 퍽 위험한 일이다.
증언자란 언제나 의심 받고, 판단 받고,
비난 받는 곳에 서있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증인으로써 그분에 대해 진술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소재는 나의 이야기다.
내 이야기는 성경과 더불어
그분을 드러내는데 꼭 필요한 도구인 것이다.
나의 증언을 듣는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나를 속속들이 알게 된다.
반면, 나는 그들을 모른다.
앎의 불균형은 권력을 생성한다.
알게 된 쪽은 힘을 갖게 되고,
알려진 쪽을 가볍게 대상화한다.
멋대로 판단하고 재판하는 일은 그 다음이다.
그렇게 나는 언제나 은혜를 구하는 가련한 증인일 뿐이다.
나의 증언을 들은 재판장의 마음이 좋은 밭이어서
그분을 예배하길 간절히 바라기만 하는.
증인의 진술은 기억을 퍼 올린 것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인의 마음에 일으킨 역사,
삶 속에 끼친 영향,
관계에 미친 은혜를 낱낱이 밝혀 증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인은 명품 가방보다 귀하게
두 돌판이 든 나무 궤를 어깨에 메야한다.
그것을 메고 두루 다니면서
삶의 고비 고비마다 두 돌판을 꺼내 읽어야 한다.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가나안 험지를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것이다.
#May. 8. 2020.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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