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인들의 집
#1.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행 13:6-7)
비너스를 출산한 아름다운 섬 구브로(키프로스).
미(美)를 숭배하던 만인은
사랑과 미의 여신의 고향을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의 지도층도 예외는 아니어서
비너스의 땅에 무인(武人)이 아닌
문인(文人) 총독을 파견하는 것은 공공연한 상식이었다.
서기오 바울은 로마에서 파견한 구브로 섬의 총독이었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문인들 중 하나였고,
문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병에 걸려있었다.
소갈증, 곧 지적인 당뇨의 괴롭힘을
상습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진리의 생수를 마실 때까지
일절 해결될 수 없는 종류였다.
로마의 지식층답게 그는
최상의 지혜를 두루 섭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갈증은 해결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유대인 선지자 바예수를 곁에 두었다.
어떻게든 진리의 양식을 구해
먹고 마시고자 했던 간절함의 발로였다.
그러나 바예수의 정체는 거짓 선지자.
그가 건네주는 물은 생수처럼 보였으나
사실 소금이 잔뜩 섞여있었다.
마실수록 곱해져가는 갈증으로 괴로워하던 어느 날,
서기오 바울 앞에 진짜가 나타났다.
먼 안디옥으로부터 진리의 생수를 들고
바울과 바나바가 도착했던 것이다.
이 마술사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행 13:8-9)
진짜의 등장으로 가짜는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요술을 부려 소금물을 생수로 속여 팔던 거짓 선지자는
한층 더 집요하게 서기오 바울을 물고 늘어졌다.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할 때면,
그의 곁에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유대 정통 교리에 능통한 자신이
그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해주겠다는
그럴 듯한 핑계가 그에게는 있었다.
그는 복음을 두고
신뢰할 수 없는 뜨내기들의 이단 사상이라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게다가 이단 사상에 홀리면 인생을 망치는 것은
순식간이라며 공포심을 조장하는가 하면,
복음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순간
로마 황제에게 반역하는 역도가 되는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서기오 바울의 진리에 대한 열망은
사도 바울의 복음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 바예수는
서기오 바울의 눈을 가리고 그의 시력을 빼앗았다.
그로 인해 진리를 앞에 두고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서기오 바울이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은 또한 긍휼의 영이기도 하셨다.
전 생애를 걸쳐 근면히 진리를 구하던 서기오 바울을
성령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하여 그분의 불꽃같은 시선이
사악한 방해꾼 바예수를 지목하고 말았다.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 지라
(행 13:10-11)
화염처럼 이글거리던 성령님의 눈이
거짓 선지자의 눈과 부딪혔다.
불꽃에 데인 바예수의 눈은 즉시 제 기능을 상실했다.
그 어떤 빛도 들지 않는
캄캄한 구덩이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그는 사악한 거짓말이 지어낸
어둡고 축축한 동굴 속을 기어다니는 절지동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한부였다.
진리의 영께서 그 옛날의 사도 바울처럼
바예수도 불쌍히 여기셨던 까닭이었다.
근면 성실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도 바울도
진리의 영에 의해 시한부 장님이었던 전력이 있었다.
그렇게 바예수는 불쌍히 여기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한동안 어둠 속에 갇혔다가
다시 진리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터였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침을 놀랍게 여기니라
(행 13:12)
바예수라는 안대가 풀리자
서기오 바울은 곧 진리를 직시했다.
직접 생수를 맛본 그의 반응은 놀람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 종류의 놀람이었다.
타는 갈증이 단번에 해결되었다는 놀람인 동시에,
지금까지 맛보았던 모든 것들의 실체가
구정물과 소금물이었다는 깨달음으로 인한
놀람이었다.
그렇게 서기오 바울과 사도 바울은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속이는 영 바예수가 소멸되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어
복음 안에서 화평하게 되었던 것이다.
#2.
“피난처를 떠나 장막으로 이사하겠다고?
제대로 말도 못하고 도와줄 사람 하나 없으면서?
쳇, 지나가는 동네 개가 다 웃겠다!
백퍼센트 사기 당하고 말걸.
그리고 잘 생각해 봐.
이렇게 말도 안 통하는 선교지에서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평생 시간 낭비에 고생만 하다가
허무하게 소멸하고 말걸.”
우크라이나에 정박한 지 9개월쯤 되었을 때,
우리는 임시 피난처를 떠나 지속적으로 머물며
예배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그분은 이사할 처소의 이름을
대뜸 붙여주셨다.
<Дом Свидетелей; 증거인들의 집>
복음의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들이
살며, 사랑하며, 예배하는 곳이라는 의미였다.
도와줄 이 하나 없이
문자 그대로 그분만을 의지하면서
장막을 찾는 일에 용감하게 착수했다.
분명히 두렵고 떨림,
기대와 소망으로 시작한 사역(!)이었으나,
공교롭게도 거짓 선지자 바예수의 사역도
그 즈음부터 본격화되었다.
처음에는 ‘괜찮을까?’라는
사소한 불안으로 시작되었다.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는 사소한 걱정으로 여겨졌기에
별 생각 없이 방치하는 편을 택했다.
그러나 집을 구하러 다니는
수 주일 사이에 상황이 달라졌다.
거슬리다 못해 신경이 뭉텅이로 쓰일 만큼
바예수의 성량 데시벨이 급상승했던 것이다.
나그네, 이방인, 외국인으로서
현지인들과 손짓 발짓을 해가면서 관계를 맺는 동안,
마음 여기저기에 난 상처가
바예수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다 급기야 바예수의 잔소리가
마음의 스크린에 상영되기 시작했다.
은막 위에 펼쳐진 사실감 넘치는
총천연색 두려운 이야기는
막연한 불안감을 실재로 둔갑시켜버렸다.
이후에 자초지정을 알고 보니,
<불안감>이 작가 <걱정>에게 시나리오를
집필케 한 후에 환난 블록버스터를 만들어
불법적으로 상영한 것이었다.
거짓 선지자의 가짜 뉴스에게 홀린 마음은
안위를 잃은 채 곤고해지기 시작했다.
진리를 추구하던 마음이 거짓말에 미혹되어
벌벌 떠는 꼴은 조롱당해도 쌀 만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웠다.
그럼에도 우악스럽게 터를 잡고
호령하는 바예수를 쫓아낼 힘이
진리를 쫓는 자에겐 없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이 되어
신음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런 내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성품이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
성령이셨던 것이다.
주의 성령이 바예수를 주목하신 것은
그의 권세가 한창일 때였다.
무성한 갈대가 그분의 눈과 마주치자
번개 같은 불꽃이 일었고,
무성한 갈대에 붙은 불은
그것이 한 줌 재가 되기 전까지 놓아줄 줄을 몰랐다.
그렇게 바예수는 차근차근 은막 뒤로 사라져갔다.
전쟁 같은 심판이 끝나자 미풍이 솔솔 불어왔다.
“기억하라!”
그분의 음성이 마음 전체에 번지기 시작했다.
왕들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사 49:23)
너 곤고하여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받지 못한 자여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여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홍보석으로 네 성벽을 지으며
석류석으로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며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
너는 공의로 설 것이며
학대가 네게서 멀어질 것인즉
네가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며
공포도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할 것이라
(사 54:11-14)
피난처 한편에 자리한
책상머리에 붙어 있는 노란 포스트잇.
그 안에 깨알처럼 박혀 있는 자음과 모음들이
비로소 성령의 말씀이 되어 실제로(!) 마음속에 젖어들었다.
이미 지난 4월과 5월에 허락해주셨던
약속의 말씀이었건만
바예수의 훼방으로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고요해진 마음으로 나는 소망한다.
<증거인들의 집>을 구하는 전 과정 속에서
약속을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충만히 알아가기를,
단어 하나 음절 하나 놓치지 않고
모든 말씀을 꼼꼼하게 형상화시키시는
말씀의 하나님을 즐거워하기를.
키리에 엘레이손!
#Jul. 14. 2018.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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