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책, <개신교신학 입문>을 읽고.
발부리가 놓이는 곳마다
터줏대감들이 손을 흔든다.
담배 꽁초를 위시한 피곤해 보이는
마구잡이 쓰레기들.
눈인사는커녕
눈살을 찌푸리기도 지치는 요즘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는 바다.
동방교회 전통의 신심(信心)이
오물 밑 맨틀에 깊이 뿌리내려 있을 터다.
그것은 공산주의 정권이 맹렬히 쏘아대던
총알 아래서도 끊길 수 없었던
우크라이나의 숨통이다.
끝장낼 수 없는 존재의 터전,
곧 동방교회의 손바닥 위에서 공산주의는
한동안 까불다가 덧없이 사라져갔다.
오래도록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나는 역사래 봐야
고작 백년이 조금 넘은 한국교회에서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들 중 하나다.
이는 분명 영광스러운 일이나,
파송된 곳이 하필이면 우크라이나다.
이곳은 수천 년간 이어져온 동방교회의 전통이
면면히 살아 숨 쉬고 있는 나라다.
한국과 우크라이나 양자의 기독교 전통과
세월의 무게를 달아 비교할 때면
민망함이 쉬이 번진다.
나는 간혹 코미디언이나
삐에로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재산이라고는 양 한 마리가 전부인 가난뱅이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가진 갑부에게 양에 대해
가르치려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동방과 서방 교회 모두의 하나님은
코미디를 좋아하시지 않는가!
연약하고 혐오스러운 십자가로
세상 반짝이는 지혜와 강력한 권력의 우스꽝스러움을
폭로하면서 박장대소하시는 분이
우리들의 하나님이니 말이다.
동방교회의 거대한 유산이 버티고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개신교 교회는
한낱 하룻강아지일 뿐이다.
그럼에도 주께서는
호랑이에게 하룻강아지를 보내셨다.
어쩌면 그분은 하룻강아지의 패기로
늙고 병들어 깊은 잠에 빠져있는 호랑이를
깨우고 싶으신 건지도 모른다.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호랑이에게
작은 환기(喚起)를 투척하기 위해서,
혹은 그의 안일함에 일침을 가하기 위해서
하룻강아지들을 파송하셨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하룻강아지는
제 본분을 다하면 주인의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룻강아지 됨,
곧 개신교신학의 정체성을
새삼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이 책 <개신교신학 입문>을 손에 들었던 이유는
정확히 그것이었다.
입문서는 대개 그 분야의 베테랑에게
쓸 자격을 부여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입문서로서 손색이 없다.
20세기의 대표적인 개신교신학자로서 칼 바르트는
인생의 말년에 <개신교신학 입문>을 집필했던 것이다.
책의 얼개를 보면
4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과 닮아있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신학의 자리’로부터 시작하여 ‘신학적 실존’,
‘신학의 위기’를 거쳐 ‘신학적 작업’으로 마친다.
또한 4개의 부는 또한 4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신학의 자리는 말씀, 증인들, 공동체, 성령으로,
2부 신학적 실존은 놀람, 당황, 의무, 믿음으로,
3부 신학의 위기는 고독, 의심, 시험, 희망으로,
마지막 4부 신학적 작업은 기도, 연구, 봉사, 사랑으로
마치 프랙털(Fractal)처럼 각부의 구성은
책 전체 구성과 닮아 있다.
내용적인 면에서 책의 처음 두 장은 신학의 존재론을,
다음 두 장은 신학의 행위론을 배치하고 있다.
그렇게 저자는 책 전체의 얼개와 형식을 통해서
개신교신학이란 성령과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소망과 사랑의 덕목으로 끊임없이 행동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공동체의 행위이자
한 개인의 행위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학자는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가장 깊은 내면에서
언제나 기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기뻐한다는”는 것은 이 옛말의 좋은 의미에 따르면
만족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너의 생명의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고 잠잠하라!”
- 신학적 실존 중에서
개신교 신학의 주도권은
철저히 신학의 대상이신 복음의 하나님에게 있다.
신학자는 그가 신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때 그분의 부르심을 받는다.
복음의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분에게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의무를 발견해 나간다.
성령의 인도와 선물로 받은 믿음에 의지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시는 것만큼
신비로운 앎을 누리는 것이다.
이 여정의 특징은 기쁨이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적인 즐거움이 아니다.
피곤, 환난, 고통, 슬픔, 분노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자(!)로서
내 존재의 디폴트는 기쁨인가?
영점조절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말씀의 선포자는
말씀의 오심을 지시함으로써
그 말씀에 봉사할 수 있는가?
이것은 바로 언어의 문제다.
말씀의 선포는 한편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이 말씀을 지시하기 위해서
“권위적 발언”의 성격을,
다른 한편으로 “인간”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시하기 위해서
“말 건넴”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
언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언어가 되려면,
선포의 근원의 관점에서는 최고로 비범하게
그러나 선포의 목적의 관점에서는
대단히 평범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선포의 언어는 축제적인 동시에 일상적으로,
성스러운 동시에 세속적으로 말해야 하고,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뒤따라 이야기하는
동시에 오늘의 그리스도인과 일반 사람들 안으로
이야기해야 하며, 중심적으로는 주석과
교의학의 가르침을 받지만 동시에 형식적으로는
각각의 때에 가장 필요한 심리학, 사회학, 언어학 등의
재치를 섞어 넣은 언어여야 하며, 가나안의 언어인 동시에
또한 애굽의 바벨론의, 각각 “현대적인” 일상 언어여야 한다.
그 언어는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
인간 안으로 진입하는 말씀을 지시해야 하기 때문에
전자로부터 후자에 이르는 낙차 큰 경사 안에서 말해지며,
이 순서는 역전될 수 없다.
-신학적 작업 중에서
개신교 신학자란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
곧 로고스를 객체가 아닌 주체로 인정하면서,
자신의 전 존재와 일을 통해 그분을 연구하고
알아가는 동시에 그분을 이야기하는 일을
생의 과업으로 삼는 자다.
결국, 신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도구는 언어다.
특별히 신학자는 미스터리한 로고스 씨가
주어가 되는 문법에 능해야 한다.
그것은 설명적, 분석적 언어라기보다는
시적, 은유적 언어에 더 가깝다.
단어 하나, 조사 하나도 허투루 쓸 수 없는 것이
신학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신학자가 쓴 책답다.
모던한 설계도대로 꼼꼼히 지어냈어도,
구체적인 문장들을 접할 때면 문학적이고도
섬세한 표현에서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독서의 풍미를 배가시켜 주었음은 물론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나가는 소나기”와 같다.
그것은 지금 여기는 쏟아지지만,
그다음에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쏟아진다.
그와 같이 신학적 인식은 언제나 저 사랑 안에서
다소간 발생할 수 있며,
때로는 좋은 작품이 될 수도 있다.
-신학적 작업 중에서
신학대학원생 시절, 교수들은 칼 바르트에게
<신정통주의>라는 명찰을 달아주었다.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는 점에서 칼 바르트를 기특하게 여겼으나,
그리스도 중심으로 선포된 말씀과
그렇지 않은 말씀을 분류한 일로 그를 폄하했다.
유일무이한 성경의 절대 가치를 훼손했다는 이유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성경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격렬하게 주장하던 그들이
오히려 우상 숭배에 빠졌다는 것이다.
성경을 지나치게 신성시한 나머지
열어서 즐겨 묵상하는 대신에
책장 높은 곳에 올려놓고는
덮어놓고 경배만 했던 것이다.
오뉴월을 지나 무려 7월에 도착했는데도 내복 착용 중이다.
예년과 달리 서늘하다고들 하는데,
덕분에 이 맘 때면 늘 우기로 서늘했던 케냐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나의 선교지는 추위가 기본 값인 듯싶다.
그렇게 <개신교신학 입문>은
추운 선교지에서 살아가는 개신교 선교사에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것을 뜯어 태운 듯
온기를 전해준 책으로도 기억될 것 같다.
#Jul. 5. 2018.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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