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걷다
#1.
“잘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홍해로 인도하셨다는 것은
홍해를 가르시겠다는 뜻입니다!!”
그의 이야기가 절정에 오르자 우리도 덩달아 고양되었다.
열광적인 지지와 찬사가 장내를 가득 메웠다.
몸져 누워버린 일상에 대량 비타민 주사라도 맞은 듯 했다.
그 시절 유학생 부인들 중에는 힘들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이집트 군대와 홍해 사이에서 망연자실하던 이스라엘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퍽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아직 어린 연배다 보니
기적을 믿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찢어진 바다처럼 냉큼 해결될 자기 고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을 터였다.
그 후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날의 큐티 세미나를 돌이켜보면
그것은 일종의 파티였다.
산전(山戰)은 얼추 겪었어도,
수전(水戰)은 아직인 어중간한 이들이 벌였던 파티.
그 시절의 잔치가 추억은 되어도
그립지 않은 것은 사리에 맞다.
산전수전(山戰水戰) 모두를
대강이라도 겪은 자는 알고 있는 것이다.
어린 환상은 기필코 깨지기 마련이고,
환멸은 지독히 고통스럽다는 것을.
#2.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출 14:21-22)
새벽녘 성경을 열었을 때,
홍해는 이미 여호와에 대한 순종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자기 본성을 거슬러
절대로 갈라질 수 없는 제 몸을 갈라놓았던 것이다.
홍해의 밑바닥이 들어나자
이스라엘의 진군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집트 군대가 죽일 듯이 뒤를 쫓고 있던 까닭이었다.
첫 주자의 발이 바닷길에 놓이자, 나머지 발걸음들이
도미노처럼 그 길 위로 와르르 밀려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들 중에 내가 끼어있었다.
차례가 이르자 뒷사람에게 떠밀려
하는 수없이 바다 한복판으로 밀려들어갔다.
아직 물기를 못다 뱉은 땅은 질퍽했다.
걷기에 좋은 땅은 분명 아니었지만,
걷지 못할 땅도 아니었다.
길 양쪽에는 바닷물로 만든 거대한 벽이 버티고 있었다.
거룩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가 벽이 넘어지지 않도록
받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덕분에 홍해는 의도치 않게 지금껏 보지 못했던
웅대한 아쿠아리움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물속을 환히 비춰주는 조명등 하나 없었기에
저 멀리 바다 안쪽은 새까만 먹지를 발라놓은 듯 했다.
그래도 투명한 벽 가까이에서는
다채로운 바다 생물들이 유영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들이 벽이 뚫고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것이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되는 한계라는 것을
바다 생물 전체가 이미 숙지하고 있는 듯 했다.
더러 수레바퀴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바다 밑바닥에 박힌 돌부리에 걸렸던 것이다.
그것은 행렬을 다소 지체시켰으나,
장시간 정체시킬 수는 없었다.
서로 합력한 힘이 돌부리를
무사히 넘어갈 수 있도록 수레를 이끌었다.
#3.
관광객들이 낼 법한 웅성거림이나
가벼운 탄성은 그 길에 전무했다.
간혹 물색없는 아이들이
바닷물로 만들어진 벽을 만지면서
장난을 치기는 했어도 잠시 뿐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자나가야 하는 길이었기에
부모가 그들을 그냥 나눌 리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두려움, 불안함, 긴장감을
제 각기 얼굴에 쓰고는 숨죽이며
앞 사람을 따라 묵묵히 걷고 또 걸었다.
조금 전까지 횡행했던
이스라엘의 불평과 원망의 소음은
어디로 달아나버린 걸까?
일순간의 음소거는 초조함을 더해만 갔다.
가축들의 울음소리, 삐걱거리는 수레 소리,
부모에게 쥐어 박힌 물색없는 아이들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뜨거운 환호로의 뒤바뀐 것은
홍해를 무사히 건넌 후에 일어났다.
바다를 등지고 마침내 땅에 당도했을 때,
안도의 한숨과 함께 탄성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깨달음이
폭죽의 재처럼 그들에게 떨어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바다를 뚫고 지나온 여정이
여호와께서 행하신 기적이었다는 깨달음.
그것이 빚어낸 찬송은
기념비적인 노래가 되기에 충분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1-2)
#4.
지난 해 여름, 굳이 샌프란시스코에 갔던 것은
우크라이나 거주 비자를 받기 위해서였다.
보통은 일단 여행 비자로 우크라이나에 입국한 후,
거주 비자를 위해 주변 나라를 잠시 다녀오는 것인데도 말이다.
보통의 번거로운 수고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수고를 피하려다
특별한 수고 까지 해야 하는 경우가 인생에는 부지기수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도 그랬다.
첫판부터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변수의 출현으로
정신은 가출했고, 얼이 빠진 와중에도
일을 신속히 처리해야 했던 탓에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결국 비자를 손에 쥐기는 했으나(은혜로!),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우리의 비자 발급을 때문에
대사관 직원의 퇴근 시간이 30분 이상 지체되었던 것이다.
(그에게 주의 평강이 가득하길!)
미안한 마음을 어깨에 한가득 짊어지고
대사관을 빠져나오던 그 날의 뻐근함이
나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이후, 비자를 위해
더 이상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편안함의 유통 기간은 기대보다 늘 짧은 편이다.
편안함이 상하기 시작한 것은
하영양의 18세 생일 즈음부터였다.
우크라이나의 비자 관련 법규가 엄격해지면서
하영양이 비자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불거진 것이다.
보통의 수순을 따라
많은 우크라이나 거주 외국인들이 비자를 받는 나라, 폴란드.
평범한 절차를 밟기로 한 우리는 폴란드의 크라쿠프로 향했다.
신속히 해치우고 재빨리 지나가야 하는 길이었기에
다른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불안함, 초조함, 긴장감, 두려움을 얼굴에 쓰고 달려갈 뿐이었다.
그 와중에 억울한 감정이 뒷목덜미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기어이 우크라이나 주변 국가를 다녀와야 하다니,
꼭 이렇게 까지 해야만 하나요?
#5.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비자는 수월하게 나와 주었다.
덕분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크라쿠프에 이어
바르샤바를 지나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있었을 때,
서두르는 법이 없는 깨달음이 옆구리를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가볼 일 없을 거라던 바다 한복판에 난 길,
그 길 폴란드를 기어이 지나온 것이로구나!
어쩌면 그분은 이스라엘에게
광야에 있는 무수한 길들 중 하나가 아니라,
바다 한가운데로 난 오직 한 길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길, 그 기적을 걸으면서 주님의 위대하심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게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당시에는 신속하게 건너는 것이 목적이어서
기적의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이후 반성과 회고를 통해 주의 위대하심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을 이스라엘이다.
개인적 성향 상,
해저(海底)를 밟고 지나가는 일을 선호할 수는 없다.
심오한 뜻과 막대한 기적이 보장되어 있다고 해도
그 보다는 안전한 편에 마음이 가는 것이 나다.
수없이 많은 탈출 경로들이 있는데,
굳이 바다를 갈라 급조(急造)한 길로 인도하시는
그분의 행사가 탐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향이 다르다고 상대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더구나 상대를 사랑한다면 존중하여 수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6.
주는 바다를 가로질러 큰 길을 내셨습니다.
주께서 바다 한가운데로 작은 길을 내셨습니다.
물론 주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 77:19/ 쉬운 성경)
폴란드.
그곳은 그분이 내게 주신 수많은 바닷길들 중 하나다.
상상한 적도 원한 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불안하기 짝이 없는 길, 그 바다 한 가운데 난 길을
나는 신속히 빠져나왔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가만히 반성해 보니,
그 길은 기적이었다.
내 인생에서 절대로 가볼 일 없을 거라고 여겼던
바다 한 가운데를 나는 기어코 걸었던 것이다!
뒤돌아 지나온 그 길을 응시한다.
이집트의 말과 병거가 바닷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그것들을 호령하던 용사는 다름 아닌
모든 것을 제 뜻대로 통제하자 했던 교만이다.
마지막 교만을 집어삼켜버린 홍해가
순진한척 능청을 떤다.
수줍은 듯 박수를 치듯 파도를 친다.
곁에 서있던 미리암이 소고 하나를 불쑥 건넨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은 나는
여자들을 따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출 15:21)
#Feb. 25. 2018.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