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버포드의 책, <하프타임>을 읽고.
십 여 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었다.
독서의 힘은 능동적 의지가 아니라 수동적 책임에서 나왔다.
책모임에서 선정한 책인 지라 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전에도 좋지만은 않았었는데,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유는 퍽 단순했다.
노골적으로 Doing을 강조하는 책이었던 것이다.
꾸준히 Being을 추구해왔던 우울질 독자에게
Doing을 강조하는 담즙질 저자의 책은 만족스러울 리 없다.
게임을 좋아하고, 특별히 이기는 것에 열광하는 담즙질답게
저자는 인생을 풋볼 경기에 비유한다.
풋볼 경기는 전반전, 하프타임, 후반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기의 승패가 후반전에서 결정되는 까닭에
승리를 위해서는 하프타임을 잘 보내야한다는 것이 책의 요지다.
전반전은 자기 성취를 위해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시간이다.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사람은
서서히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국면으로 자연스럽게 접어든다.
성공적인 삶에서 의미 있는 삶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하프타임, 곧 작전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프타임은 그동안 산만하게 벌여왔던 일들을 단순화시켜
최종적으로 하나로 집중시키는 기간이다.
집중된 하나의 일을 저자는 사명이라 부른다.
사명은 자신을 포함하여 지역사회에 유익을 주는 일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의미 있는 일을 즐겨 할 때,
성공적인 인생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책을 한소끔 끓여서 베보자기에 싸서 짜면,
효과, 효율성, 생산성, 성취주의가 가득 나올 것이다.
저자가 자신의 묘비명으로 선택한 ‘100×’는
제아무리 인생의 후반부에 의미를 추구한다 해도
그것이 생산성과 성취주의의 조금 다른 포장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의미한다.
사업에 있어서 인적 자원 계발과
시의적절한 운영 등으로 수익을 냈던 저자는
자신의 재능을 교회에 사용하면서
의미 있는 후반전을 뛰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에게 예배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일요일 아침에
한두 시간 동안 비현실적인 공간에 몰아넣어 고립시키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임을 간과하는 자가 교회 운영에 조언을 하고,
교회의 잠재 에너지를 활성화 시키는 일을 한다고
어깨에 힘을 주는 꼴이 우울질 독자는 몹시 언짢다.
일전에 기업 마인드를 가진 자가 교회의 구조조정을 한답시고
가치와 의미를 지닌 부서를 없앴던 일이 있었다.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기준으로 쓸데 없다고 재단하여 잘라버린
그 부서를 두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이 사실은 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이었다고.
게다가 저자는 후반전에서는 좋아하는 사람과 일하라고 조언한다.
그런 사람들과 일하면 생산성은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일종에 클럽을 만들어 일하라는 것인데,
애석하게도 교회는 클럽이 아니라 공동체다.
공동체는 어렵고 싫은 사람이 늘상 끼어 있는 모임을 의미한다.
거슬리고 못마땅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본인의 불온전함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Being(성품)을 아름답게 다듬기 위함이다.
그렇게 교회 공동체는 꺼리는 상대를 용납하고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훈련소다.
나는 이 의사의 재정 상태를 잘 모르지만,
추측컨대 그의 생활방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중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의 희생이라고 하면
대개는 자동차를 렉서스에서 뷰익으로 바꾸거나
펀드에 돈을 조금 덜 투자하는 정도다.
이 의사의 후반부 계획은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없으면서도
대단히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덕에 마을 사람들 전체가
건강하다는 생각을 하면 무척 뿌듯했다.
-본서 중에서
저자가 말하는 후반전에서의 봉사와 섬김은
‘이타적 이기주의’의 표현이다.
상대를 위하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적은 양보와 봉사로도 충분히 뿌듯하게 살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이야기는 독자를 퍽 안심시킨다.
부를 즐기는 동시에 가치 있는 일로 자존심에 힘 꽤나 주면서
살 수 있다고 속살거리니 말이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인(원수)을 위해
자기 외아들을 완전히 희생시킨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너희도 온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닫지 않는 이상
저자의 말은 거짓 안심일 공산이 크다.
그렇다고 저자의 이야기가 전부 옳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Doing에 의한 Doing을 위한 책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곧 지나치게 생산성과 성취주의에 찌든 표현들을 발라낸다면,
살코기 한 점쯤은 얻어먹을 수 있다.
인생 전반부를 사는 사람들은 거의 다
삶이 질서정연하고 깔끔하기를, 종교가 이성적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질서와 혼돈,
세상에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 어중간하게 놓여 있다.
따라서 전반부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시작하고
우리 삶에 질서를 부여하겠다는 욕구를 억누를 때
비로소 이러한 긴장 속에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
-본서 중에서
‘우리 삶에 질서를 부여하겠다는 욕구를 억누른다’는 표현을
‘우리는 삶에 질서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수용한다’로 바꾸면
저자의 이야기는 퍽 지혜롭다.
인생이 역설과 아이러니 투성이라는 것,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전부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수용할 때,
얼마 간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용하기 까지 수없이 많은 저항과 실망과 포기와 체념의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하겠지만 말이다.
자주 체념하는 나의 모습이 걱정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인생의 모순을 수용하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서
나는 내 자신을 조금 너그럽게 보아주고 싶다.
우울질에게 인생은 게임일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여정이다.
게임의 하프타임은 여정의 휴게소와 비슷하다.
지속되는 여정 속에서 휴식은 단번의 순간일 수 없다.
그것은 여정의 고비마다 잠시 숨을 고르면서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늠하는 반복되는 과정이다.
책을 통해서 Doing의 관점에서 잠시 내 인생의 여정을 훑어보았다.
지금까지는 학업, 교회 사역, 묵상 사역을 주로 해왔다.
안식년이라는 휴게소에서
앞으로의 Doing에 대해서 가늠해 본다.
변화가 있을 듯도 하다.
흐음~
#Mar. 15. 2017.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