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1.
케냐 시절, 우리는 결국 마마 대신 세탁기를 집에 들였다. 잡다한 가사 노동은 별도로 하고, 빨래 하나만으로도 꽤나 저렴한 인건비라고들 했지만 말이다. 처음 우리 집 세탁기는 대야에 담은 수돗물을 연거푸 통에 채우는 수고를 통해서만 작동되는 반자동이었다. 그러다 한 번의 이사를 통해서 그것은 전자동으로 변신에 성공했다. 그렇게 처음부터 케냐를 떠나는 날까지 마마는 우리 집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마마를 고용하여 가사 노동을 시키는 집에서도 하나 둘 세탁기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빨래가 가사 노동 중 가장 힘들다는 이유였다. 고용인들은 마마의 편의를 위해 세탁기를 구입하고 그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중 한 고용인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마가 본인의 집 빨래를 가져와 주인집 빨래와 함께 돌리는 것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마음씨 좋은 고용인은 세탁기로 마마 본인의 빨래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다만, 자신의 집 빨래와 마마 집 빨래를 분리해서 할 것을 종용했다.
#2.
“하지만 만약 우리 애가 그중 하나라면?” 펄롱이 말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아일린이 다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미시즈 윌슨이 당신처럼 생각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 안 들어?” 펄롱이 아일린을 쳐다보았다. “그랬다면 우리 어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본서 중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특정한 장소는 세상 어디에나 존재한다. 아일랜드의 경우에는 수녀원을 중심으로 아일랜드 국가가 함께 운영하던 막달레나 세탁소가 그런 곳이었다. 소설은 수십 년 동안 인권 유린의 성지(?!)였던 막달레나 세탁소가 어떻게 붕괴되고 사라졌는지, 그 단초를 보여준다. 작가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거대한 악의 본진에 균열을 일으켰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 모여 마침내 그 견고한 진을 혁파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본서 중에서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란 없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없고, 그것은 내일과 분명히 같을 리 없다. 그것이 전복적인 변화가 반복되는 일상을 배경으로 발생하는 이유다. 사소한 것들의 변화가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폭발적인 변화가 급습하듯 초래되는 것이다.
한 손에는 아내에게 선물할 크리스마스 선물인 구두를, 다른 한 손에는 수녀원에서 구출한 맨발의 가련한 소녀의 손을 붙들고 집에 도착한 펄롱을 보았을 때, 그의 아내와 다섯 딸들의 표정이 너무나 상상이 된다. 그리고 그 후 벌어질 크고 작은 환난과 시련, 그리고 그로 인한 불행들이 자동 재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해나가리라는 펄롱 씨의 진심에 응원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순진한 마음들이 하나 둘 모아져 결국, 거대한 악인 막달레나 세탁소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까닭이다.
#3.
어쩌면 펄롱은 슬로브핫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다섯 딸들로 말할 것 같으면, 가부장적인 유산 상속 전통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후(死後)에 여호와께 유업 상속권을 논리적으로 당당하게 주장하여 합법적으로 증여받아 후대에 선례를 남긴 개혁의 장본인들이었다. 즉, 딸들을 비범한 사람으로 교육한 아버지가 슬로브핫이다. 그렇게 펄롱 역시 슬로브핫처럼 그의 다섯 딸들을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 못지않은 비범한 딸들로 길러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파이팅, 이 땅의 모든 비범한 슬로브핫이자, 비범한 펄롱님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Dec. 21. 2024.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