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구름 속의 날들

창고지기들 2012. 5. 26. 17:28

 

 

 

 

#1. 안개와 구름

 

 

며칠 전 이른 아침,

아이들 학교 배웅을 나갔다가

예기치 않게 자욱한 안개 더미를 만났다.

대기 중에 떠다니는

안개 한 알갱이 한 알갱이들(물방울들)을

또렷이 보는 일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안개 속에서 하영양은

기쁨의 탄성을 지르면서 말했다.

 

“와! 꼭 구름 속을 걸어가고 있는 거 같아!”

 

“구름이나 안개나

모두 물방울로 이루어진 것들이니까

나쁘지 않은 비유야.”

 

경이로운 자신의 경험을

시적인 비유로 표현하는 딸아이에게

돼 먹지 못한 평가를 하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러면서 나는

한창 지적 허영심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에

뭔 소리인지도 모르고 읽었던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을 떠올렸다.

 

그 책에서 바슐라르는

과학적, 물질적 상상력을 이야기했었는데,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안개의 물방울을 가지고

구름의 물방울에 가닿는 하영양은

굳이 바슐라르를 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탁월한 듯 보여 흐믓했다.ㅋㅋㅋ

 

 

 

 

 

 

 

#2. 구름 속의 모세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출애굽기 24:16-18)

 

 

모세는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

하나님께서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하신

돌 판을 받기 위해서 산에 올랐다.

그런데 모세가 처음 산에서 만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구름이었다.

 

그는 꼬박 엿새를 구름 속에서

하나님을 기.다.렸.다.

(과연은 모세는 예상을 했었을까?)

그리고 일곱째 날에 비로소

바로 그 구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전통적으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자,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한다.

즉, 모세는

그 분이 없는 것 같은 구름 속에서

엿새 동안 하나님의 임재에 푹 적셔졌고,

일곱째 날에 비로소 그 분을 알아보고,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모세가 고요한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푹 적셔지는 동안,

산 아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맹렬한 불 같이 보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산 아래 백성들은

모세가 산 위에서 여호와의 불에 의해

타죽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추측은

하루, 이틀, 사흘, 나흘...사십일이 되도록

모세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출애굽기 32장에서

결국 금송아지를 만드는 죄를 지었던 것이다.

 

 

지금 나는 그 분의 분부를 따라

높은 고산지대인 케냐에 올라와 있다.

높은 케냐에서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신나게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가 아니라

모세처럼 역시나 구름이다.

 

자욱한 구름 속에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나는

때로 나의 부르심이 확실한 지,

혹은 그 분을 만날 수 있기는 한지,

때때로 몰아치는 의구심으로 번민에 휩싸이기도 한다.

 

어쩌면 케냐가 아닌

한국과 미국에 있는 지체들의 눈에

지금 이 곳은 맹렬한 불이 타오르고 있는 곳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오래도록

눈에 보이는 선교 사역의 결과가 없을 때는

우리를 불에 타 죽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이 곳은

여호와의 구름으로 가득하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빼곡한 구름으로 인하여

이 곳은 지독히도 고요하고, 적막하고, 고독하다.

 

허나, 말씀을 통해서 나는

이 곳의 구름은 그 분의 임재의 증거라는 것과

지금 나는 보이지 않는 그 분의 임재 안에서

조금씩 푹 적셔져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기대한다.

그 분의 임재에 충분히 적셔졌을 때,

나는 비로소 그 분을 알아보고(!),

나의 아우성과는 전혀 다른

그 분의 세밀한 음성을

더욱 또렷이 듣게 될 것을!

 

 

 

 

 

 

 

 

#3. 구름 속의 날들

 

 

결국 우리는

고작해야 한 치 앞만 볼 수 있는

안개 속을 뚫고

목적지인 스쿨버스 타는 곳에 도착했다.

한 치 앞만 볼 수 있어도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모든 길을

버즈 아이 샷(bird‘s-eye shot)으로

볼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비록 한 치 앞을 모르는 상황이지만,

오늘 내딛을 한 발 앞은 볼 수 있으니,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구름 속에서

나는 오늘도 한 발을 내딛는다.

그렇게 나는 더욱 그 분의 임재에 적셔지고 있고,

조금씩 더 그 분을 알아가는 중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May. 26. 2012.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