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의 책, <H마트에서 울다>를 읽고.
그때부터 한 달에 한 번씩 김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치유법이었다. 오래된 김치는 찌개나 전이나 볶음밥에 넣어 먹고, 새로 담근 김치는 반찬으로 먹었다. 내가 먹을 양보다 더 많이 김치를 만들었을 땐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부엌에 식료품 유리병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병에 종류 별로 담긴 김치는 익은 정도가 제각각 달랐다. 조리대 위에선 담근지 4일 된 총각김치가 새콤하게 익어갔고, 냉장고에선 갓 담근 깍두기가 수분을 내보내고 있었다. 도마 위에는 커다란 배추 한 포기가 반으로 쩍 갈라진 채 소금물에 절여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멸치액젓, 마늘, 생강, 고춧가루의 풍미 속에 익어가는 향긋한 채소 향이 그린포인트의 작은 부엌에 물씬 풍겼다. 나는 엄마가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주야장천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너한테서 항상 김치 냄새가 날 거야 그 냄새가 네 땀구멍으로 배어나올 테니까. 엄마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말했다.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 -본서 중에서
H마트는 내게 익숙한 곳이 아니다. 인생의 오분의 일(10년)을 살았던 오래 전의 LA에는 H마트가 없었던 까닭이다. 대신에 HK 마켓이나 갤러리아 마켓 혹은 한남체인 등을 찾곤 했었다.
아들아이까지 대학에 내보낸 다음부터는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는다. 거의 30년을 했으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너스레를 떨기도 하지만, 원래 나는 음식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미국 유학생 시절과 케냐와 우크라이나 선교사 시절이 나의 집 밥 전성기였다. 타국에서 한식을 저렴하게 먹기 위한 꼼짝없는 선택이었으나, 덕분에 좋은 추억을 갖게 되었다. 가끔씩 독립해 살고 있는 아이들이 모일라치면, 그 때 그 시절에 먹었던 집 밥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것도 외식을 하는 자리에서.ㅋ~
그 시절의 나는 꼬박꼬박 김치를 담가 먹었고, 심지어 우크라이나에서는 기나긴 겨울을 나기 위해서 30포기씩 김장을 담그기도 했었다. 내 평생에는 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타국에 산다는 이유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교지에서는 어떤 한식을 하든지 일단 마늘부터 까야했다. 또한 한국산 식재료나 양념 일체를 구하기 위해서는 장시간의 운전이 매우 필수였다. 그렇게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에 살 때 우리는 더욱 악착같이 한식을 해먹었고, 무엇보다도 고추장을 많이 먹었더랬다. 물론, 귀국한 후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는 것이 고추장이지만 말이다.
한국 사람이 음식에 진심이라는 말은 참이다. 먹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오롯이 하는 것이다. 우리 가족도 한국 사람이긴 마찬가지여서 그랬는지, 세계 어느 곳을 가든 반드시 한식을 챙겨 먹었다. 가는 곳마다 한국 음식을 먹음으로써 한국인임을 오롯이 하며 평안해 했던 것 같다.
‘사랑스럽다’는 말은 엄마가 굉장히 좋아하는 형용사였다. 엄마는 나를 딱 한 단어로만 표현해야 한다면 ‘사랑스럽다’는 말을 고를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엄마에게는 그 단어가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열정을 아우르는 말처럼 느껴졌나보다. 그것은 엄마의 묘비명에 새겨넣기에도 딱 알맞은 단어였다. 자애로운loving 엄마는 남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지만 사랑스러운lovely 엄마는 온전히 자신만의 매력을 지닌 사람이니까. -본서 중에서
이 책은 다문화 가정의 자녀인 저자가 써내려간 긴 호흡의 망모가(亡母歌)다. 죽은 엄마를 애도하면서 부르는 라멘트(Lament)의 일종이다. 저자와 엄마 사이에는 ‘여성과 한국인 혈통, 그리고 한국 음식’이 교집합으로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엄마를 잃은 상처를 한식, 그 중에서도 김치를 만들어 먹음으로써 치유 받는다. 그렇게 엄마를 잃은 딸은 살아생전 엄마와 나누었던 숱한 한식들을 만들어 나누어 먹음으로써, 그리고 엄마를 엄마의 배역에서 해방시켜 한 여성으로서 인정하고 수용함으로써 엄연한 인간으로서 성장해 간다.
때로는 화자(딸)의 입장에서, 더러는 엄마(타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어갔다. 저자와 같은 이유로 아버지를 잃었던 경험으로 나는 충분히 화자의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또한 언젠가 나 역시 내 딸과 이별할 날을 맞이할 것을 알기에, 딸아이에게 어떤 위로를 해주고 떠나야 하나? 골똘해지기도 했다.
장시간 미국에서 살았던 경험으로 인하여 책의 내용과 뉘앙스가 너무나 잘 이해되었다. 마치 그 시절 미국에서 함께 지냈던 한국인 친구를 만나 한바탕 수다를 떨고 난 느낌도 들었다. 저자의 뛰어난 묘사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들은 독서를 즐겁게 해주는데 큰 몫을 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대전 성심당 근처의 독립 서점에서 기념품으로 구매했던 책을 즐거워하며 마친다.ㅎ~
#Apr. 27. 2024.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