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나의 문구 여행기

창고지기들 2023. 7. 8. 10:36

 

 

 

 

문경연의 책, <나의 문구 여행기>를 읽고.

 

 

아마도 런던 여행 때부터였을 것이다. 기념품으로 양장 노트를 사기 시작한 것은. 기념품 노트들은 대부분 묵상 노트로 활용되었는데, 성경 묵상을 위해 본격적으로 노트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문방사우도 생겨났다. 양장 노트, 만년필, 잉크, 빨간 펜. 억지로 ‘4’라는 숫자에 맞춰 문구들을 열거하고 나니, 기록을 하거나 독서할 때 애용하는 다른 문구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자, 가위, 칼, 풀, 스티커, 화이트, 지우개, 색연필, 샤프펜슬, 연필, 각종 볼펜들, 라벨지, 형광펜, 수시로 만들어 쓰던 책갈피들, 페이퍼 클립, 포스트잇, 마스킹 테이프, 스탬프, 폴더 파일, 필통에 이르기까지, 문구 친구들과 함께 나는 세상의 단 한 권뿐인 책을 거의 스무 권 가까이 써왔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처음부터 문구를 좋아하고 있었던 나와 내가 좋아하는 문구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래 전 유아교육을 전공하던 시절, 과제로 보드 게임 교구를 만들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게임의 목적과 게임의 규칙 및 놀이 방법을 구상한 뒤 보드를 만들어야 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남다른 친구가 하나 있었다. 무작정 만들고 싶은 대로 보드를 만든 후,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그 놀이의 목적은 무엇인지를 짜내느라 전전긍긍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심각한 모습을 보고 나는 한참 동안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정해진 순서를 가뿐히 뒤집는 그녀의 발칙함으로부터 일종의 해방감과 긴장 이완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바로 그 남다른 친구와 비슷한 이를 만났다. 문구 브랜드 아날로그 키퍼의 문경연님이다. 이 책은 작가가 문구 브랜드를 만들기 전의 여행기를 담고 있다. 사실은 비행기 표가 싸서 무작정 시작된 여행이었으나, 그럴 듯한 명분 혹은 핑계가 필요했던 탓에 ‘문구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의 아날로그 키퍼가 탄생했다는 내용이다. 책을 통해 엿보았을 때, 편지와 일기 쓰기를 좋아하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는 감각적인 활동을 즐거워하며, 작고 소박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시각 예술을 전공한 작가에게 문구를 만들고 그것을 파는 문방구 주인장만큼 어울리는 일도 없을 것 같다. 

 

책은 파리, 베를린, 바르셀로나, 런던, 그리고 뉴욕을 여행하면서 만난 문방구와 문구를 소심하게(?; 배려심 넘치게!) 찍은 사진과 함께 소개하는 동시에, 취업을 준비하고 있던 작가가 느꼈던 미래에 대한 불안두려움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 책에서는 좋아하는 것을 보려고 돌아다며 부르는 즐거운 콧노래와 알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뭉크의 그림 속 사람처럼 지르는 비명이 동시에 들려왔다. 작가가 딸아이의 또래(?)로 보인 까닭에 퍽 안쓰럽고도 기특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창의적으로 개척해서 가고 있는 작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난생처음 제주도에 왔다. 여러 대륙과 나라들은 숱하게 누비고 다녔어도, 정작 제주도는 와보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호텔 창 밖에는 비가 내린다. 집으로 돌아갈 짐을 챙기면서 이번 여행에서 챙긴 기념품들을 정리한다. 해녀와 동백꽃과 고래를 소재로 한 페이퍼 클립, 스티커 같은 문구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들을 이용하여 노트에 제주 여행 후기를 꾸미고 만들 생각을 하니 즐겁다.

 

정리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쉽게 잊히는 것이 기억이다. 그래서 나는 기록한다. 아침마다 로고스씨와의 대화를 기록하고, 혈당 관리를 위해 매일 혈당 수치와 먹은 것들을 기록하고, 읽은 책과 보았던 드라마와 했던 일들을 꼼꼼히 기록한다. 그리고 가끔씩 다녀왔던 전시회나 공연 혹은 여행 역시 정리하여 기록해 놓는다. 그런 점에서 조금은 두꺼운 양장형 무선 노트가 나는 좋다. 펠리컨으로부터 시작해서 워터맨과 파카, 그리고 라미에 이르기까지 십 수 년을 쓰고 있는 만년필들이 좋다. 그리고 다양하고 대채로운 문구 친구들이 나는 좋다.

 

 

책을 통해 문구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취향도 소개 받았으니, 앞으로는 좀 더 대놓고 문구를 편애해보자. 바라기는 편애의 과정 중에 문구를 좋아하는 자신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는 문방구 주인을 만났으면 정말 좋겠다.ㅎ~

 

 

 

 

#Jul. 8. 2023.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