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지기들 2022. 12. 10. 16:46

 

 

 

 

 

리베카 솔닛의 책, <걷기의 인문학>을 읽고.

 

 

 

세상을 두루 살피는 일은 마음을 두루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하듯, 마음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한다. -본서 중에서

 

어쩐 일인지 나는 여전히 보행을 좋아하는 중이다. 물론, 나의 보행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두발로 걷는 직립보행이다. 동네길, 학교길, 쇼핑가(아케이드), 박물관, 미술관 등 인공적 도시들을 배회하는 것도 좋고, 공원길, 하천길, 산길 등 자연 속을 헤매는 것도 좋다. 누군가 둘 중 무엇을 더 선호하는지 묻는다면, 잠시 고민은 되겠지만 결국 나는 도시를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그간 다녀온 여행지 대부분이 도시인 까닭일 테다.

 

보행의, 보행을 위한, 보행에 의한 여행지를 내게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오스트리아 빈을 지목할 것이다. 빈에서의 나는 일종의 보행 노동자였다. 이른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선 후 저녁때까지 이 미술관에서 저 미술관으로, 이 박물관에서 저 박물관으로 쉴 새 없이 발품을 팔았다. 두 눈의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한 두 다리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썩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으니 수지맞는 장사가 분명하다.

 

 

존재한다는 것은 ‘이승을 걷는 것(walk the earth)’이고, 직업은 ‘이승의 행보(walk of life)’이고, 전문가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walking encylopedia)’이다. 구약성서는 은총을 받은 상태를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he walked with God)”라고 묘사한다. 걷는 사람, 즉 한 곳에 머물기보다 혼자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의 이미지는 초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유인원이든 시골길을 어기적어기적 걸어 내려오는 사뮈엘 베케스(Samuel Beckett)의 등장인물이든 인간의 의미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본서 중에서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은 보행에 관한 철학적, 역사적, 과학적, 예술적, 사회적, 정치적 이야기로 속을 꽉 채운 책이다. 원제는 <Wanderlust: A History of Walking>인데,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다채로운 경험들, 그리고 세련된 문장들로 인하여 ‘걷기의 인문학’이 제목으로 낙점된 듯(‘인문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책 판매지수를 높여주는데 아직은 쓸 만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보인다.

 

책에서 저자는 보행이라는 보석의 다양한 단면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데, 시작은 보행의 사유적(思惟的) 측면이다. 과학적 진화론의 직립보행, 종교적 신비주의의 성지순례, 그리고 문화적 상징주의의 미로를 선보인 후, 저자가 건너간 곳은 보행의 역사로, 그것은 장소의 문제다. 즉, 보행은 보행용 정원으로부터 자연으로 나아갔고, 그 와중에 루소와 윌리엄 워즈워스는 보행 문학과 등산 문학과 보행자들를 위한 모임과 투쟁의 왼발과 오른발이었다.

 

저자가 소개한 보행의 다음 국면은 도시에서의 걷기다. 그것은 플라뇌르(파리를 거니는 총기 있고 고독한 남자의 이미지)로부터 축제, 행진, 혁명으로 팽창하다가 홍등가 속으로 사라진다. 홍등가 걷기를 마친 저자는 헬스장으로 가서 보행을 수치로 축소시키는 러닝머신 앞에서 한동안 의아해하다가 보행 예술을 전시하는 미술관을 돌아다닌 후, 레드락 캐니언과 함께 라스베이거스의 스트립을 전전하다 멈춘다.  

 

 

밖으로 나가 걸으면서 즐거움을 얻으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자유로운 시간, 자유롭게 걸을 장소, 질병이나 사회적 속박에서 자유로운 육체가 그것이다. -본서 중에서

 

쉴 새 없이 퍼붓는 방대한 지식에 질려버릴 때면, 책을 덮고 나가서 걸었다. 내가 걸었던 장소는 하천을 따라 만든 보행을 위한 전용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나는 나의 보행을 꽤 새삼스러워했다. 보행이라는 것이 비교적 최근의 사회·문화적 산물이며, 보행의 자유를 얻기까지 역사적으로 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행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 세 가지 조건, 곧 자유로운 시간, 자유롭게 보행할 수 있는 장소, 그리고 질병이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육체가 내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나는 내내 감사했다. 그렇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두 발로 걷는 일은 내겐 일종의 선포가 되었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보행하는 사람이다!” 앞으로 한동안은 보행을 사람됨을 드러내는 일로 여길 듯하다. 

 

 

보행은 시민권의 시작일 뿐이지만, 이 시작을 통해 시민은 자기가 사는 도시를 알게 되는 동시에 함께 살아가느니 동료 시민들을 알게 되고, 도시의 작은 사유화된 곳에서 벗어나 진짜 도시 주민으로 거듭나게 된다. 거리를 걷는 것은 지도 읽기와 살아가기를 연결하는 일, 사적 세계라는 소우주와 공적 세계라는 대우주를 연결하는 일, 자기를 둘러싼 그 모든 미궁의 의미를 깨닫는 일이다. … 걷는 일이 지표종이라면, 헬스장은 몸을 쓰는 일의 멸종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자연 보호 구역이다. 자연 보호 구역이 서식지를 잃은 종을 보호하는 곳이라면, 헬스장(또는 가정용 운동기구)은 몸을 쓰는 일이 이루어지는 장소들이 없어진 이후에 몸이 멸종하지 않게 도와주는 육체 보호 구역이다. -본서 중에서

 

잦은 이사와 더불어 대륙 간의 이주를 통해, 새롭게 정착한 곳에 적응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그것은 이사한 곳을 걸어 다니는 것이다. 길과 상점과 사람들의 모습을 탐험하다가 어느새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정착이 시작된 것임을 알고 있다. 벌써 이사한지 네 달이 다 되어간다. 동네 길보다 보행자들을 위한 하천 길을 더 많이 걷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지속적인 보행을 통해 나는 이 동네의 주민이 되고 말 것이다.   

 

오래 전, 미국 캘리포니아에 형성된 교외의 주택가를 걸어 다니는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라스베이거스 스트립 보행을 ‘고난의 천리행군’이라 이름붙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케냐에서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없었던 이유, 우크라이나에서 처음 1년 동안 보행하면서 눈칫밥을 먹었던 이유, 현재의 내가 보행이 아니라 실내에서 실내로의 이동에 익숙한 실내용 동물에 가까워진 이유, 일립티컬을 살림으로 들이고 싶은 여러 이유에 대한 답을 책을 통해서 덤으로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마치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 같은 책이었다. 거대하고 딱딱한 책속은 내겐 또 하나의 보행 장소였는데, 밑줄을 긋고, 여백에 낙서를 하면서 나는 책속을 줄곧 걸어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길의 출구 앞에 도착했다. 이상과 같은 리뷰는 일종의 기념사진이다.ㅋ

 

다음 독서 보행지(步行地)는 아마도 개인적으로 더 선호하는 도시 쪽이 될 듯싶다.

 

 

 

#Dec. 10. 2022.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