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작별을 위한 만남

창고지기들 2022. 11. 5. 16:48

 

 

 

 

작별을 위한 만남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창33:15-16)

 

나의 에서를 다시 만난 것은 그 후로 5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10월의 어느 흐린 수요일이었는데, 슬프기로 작정된 날 같았다. 새벽녘에 같은 또래 외사촌의 소천 소식을 전해들은 까닭이었다.

 

우리는 점심으로 태국 음식을 먹은 후, 커피를 마셨다. 마치 어떤 전사(前事)도 없었던 양,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 맞추고, 얘기하고, 가끔씩 웃으며 두 시간 가량을 함께 했다. 퍽 담담하고 심심한 시간을 보내고 이윽고 헤어질 무렵 나는 알고 있었다. 에서와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임을, 공평하신 하나님이 갈라질 우리 각자와 기어이 동행해 주실 것임을. 그렇게 우리는 서로 아무런 상관없이 각각 잘 살아갈 것임을. 

 

10년 전 라반의 집에 도착했을 때, 나를 반긴 것은 환대가 아니었다. 박대와 착취가 다가와 나를 감쌌고, 가는 곳마다 집요하게 따라붙곤 하였다. 불행 중 천만 다행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찾아 라반의 집에까지 찾아오신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분은 임마누엘이 아니신 적이 없다.

 

그 당시 고난과 역경은 상처들을 쥐어짜 액체 상태로 만들어 쏟아지게 했는데, 아픔으로 쩔쩔맬 때마다 나는 고함치듯 그분의 이름을 불렀다. 상처에 대고 후후 입김을 불어넣는 일은 예외 없이 다가오신 그분의 일이었다. 

 

머잖아 상처가 꾸덕꾸덕 마르면서 고체화되었다. 객관화될 준비를 마친 상처는 이미 들여놓은 성찰용 돋보기의 대상이 되었다. 세월을 따라 한 겹, 두 겹 퇴적된 상처들 속에 수치가 하나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야곱이었다. 때를 잘못 만나 첫째가 아닌 욕심 많은 둘째로 태어났기에 경쟁적이 되었고, 능력으로 평가받고 싶어 안달하는 종류가 되었다. 결국, 나의 능력은 에서의 것을 뛰어넘었고, 결과적으로 장자의 명분이 에서에게는 과분하다는 판단을 제멋대로 내려버렸다. 

 

그럼에도 장자의 영광은 언제나 에서의 차지였다. 치밀어 오르는 시기심이 화를 불러들였고, 에서와의 사이에 남아있던 화목과 화평를 모조리 태워버렸다. 

 

초토화된 관계를 보다 못한 성부께서 나를 쫓아내셨다. 빈손으로 쫓겨나면서 나는 에서를 비난했다. 그러나 내가 원망하는 것은 사실 성부였다. 에서만 편애하는 것 같은 성부가 나는 언제나 못마땅했었던 것이다.

 

퇴적된 상처 속의 수치를 응시하던 마음이 뜨거운 눈물을 길어 올리자, 회개의 영이 압도적으로 나를 덮쳤다. 도망가기는 벌써 늦어버렸다. 결국, 그분을 원망하던 마음은 남김없이 빚으로 치환되었다. ‘이자에 원금까지, 이게 다 얼마야? 대체 이걸 어떻게 다 갚아?’ 그러나 갚을 수 없는 중에도 그분은 동행해 주셨다. 그리고 5년 만에 모든 빚은 청산되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롬15:32)

 

사촌을 잃은 그 날 새벽, 성부는 로마서 말씀을 주셨다. 그리고 그 저녁에 그것을 성취해주셨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에서에게로 나아갔던 나는 비로소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에서 역시 그러했을 테다. 

 

다시 만나지 않을 인연을 위해 우리는 만났던 것이다. 완벽한 작별을 위한 만남이었다. 더 이상 갚을 빚이 없었기에, 그 동안 겪어온 마음고생과 그에 상응하는 성부의 은혜가 평형을 이루었기에 그날의 만남이 담담하고 심심했던 것이다. 

 

 

에서와 작별한지 또다시 5년이 지났다. 수중에 남은 것은 은혜뿐이다. 그래서 에서를 만난 야곱이 연거푸 은혜, 은혜, 은혜, 은혜를 언급한 이유를 알고도 남겠다.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창33:5)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창33:8)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창33:10)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창33:11)

 

 

완벽하게 성취된 작별은 은혜라는 보석이 박힌 기억의 링이다. 그것을 잠시 손가락에 끼워본다. 인연이든 악연이든, 만나고 헤어지는 그 모든 것이 은혜였구나. 키리에 엘레이손!

 

 

 

 

#Nov. 5. 2022.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