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바보 되기
지혜로운 바보가 되기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마태복음 12:48)
혈육.
그들이 가족인 듯, 가족 아닌,
가족 같은 자들이 된지는 이미 오래다.
나의 육신은 그들로부터 태어나 그들에게 속했으나,
나의 영은 그리스도로부터 창조되어 하나님께 속해 있다.
이는 지난 선교사 시절에 뼈저리게 깨달은 바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2:50)
그 아픈 시절에도 주님의 말씀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참 가족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
곧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씀 앞에서 나는 오래도록 울었다.
혈육에 대한 마음은
눈물의 강나루에서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였을 뿐이다.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피조물인 까닭에
혈육과의 관계는 끊을 수 없는 숙명인 것이다.
선교사 시절,
혈육과의 물리적 거리는 퍽 아득했다.
아득함만큼 무성해지는 것은 뜻밖에도 애틋함이었다.
그러나 귀국과 함께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지자,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풍성하던 애틋함은 금세 시들어버리고,
대신에 노여움만 울창하게 번져나갔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혈육들이 모이는 곳이면
언제나 정욕과 자랑으로 들끓곤 했다.
처음에는 관찰자로서 관망할 수 있었으나,
잦은(?!) 만남은 결국 나를 끓는 가마솥 같은
그들의 다툼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의 으스대는 자랑이
낙숫물처럼 마음을 끊임없이 두드려대자
내 안에 잠시 잠들어 있던 욕망들이
결국 깨어나고 말았다.
아예 없앨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욕심은
잠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뒤,
본격적으로 자기 일에 착수했다.
누군가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
형제간의 시기심이라고 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정말 배가 아픈 것이다.
바로 그 원초적인 감정으로
인류 최초의 형제였던 가인과 아벨은
각각 살인자와 피해자가 되었다.
결국, 혈육 간의 경쟁심과 시기심은
타락한 인류에게 내려진 지옥의 족쇄인 것이다.
내 혈육들은 예외 없이 모두 세속주의자다.
소비주의, 성공주의, 출세주의, 물질주의,
자본주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뒤엉킨 그들의 것이
나의 것과 다름은 물론이다.
그러나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세속적 세상 속에 살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들은 세속적 세상이라는 공통점을 근거로
세속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에게 심판을 맡긴다.
그것이 내가 언제나 패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들은 이기기 위해
서슴없이 자신의 업적과 성취를 자랑한다.
상대방의 인정을 받을 때까지,
혹은 자기가 이겼다는 확신이 굳어질 까지
그들은 쉴 새 없이 공치사를 한다.
아무리 평정심을 지키려 해도 나는 연약하다.
결국 부아가 치밀어 오르고 만다.
나의 옳음을 따라 그들의 그름을 지적하고 싶고,
논리적 말다툼을 통해 그들을 이겨먹고 싶다.
하지만 나는 비겁하기도 하다.
그래서 말다툼 대신에
그들의 말을 마음에 담아둔 후에 혼잣말을 하기 일쑤다.
혼자 지적하고, 혼자 꾸짖으며, 혼자 훈계를 하기도 한다.
이는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거듭 되풀이 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린도전서 3:1-2)
이런 나를 향해 사도 바울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너는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일 뿐이라고.
그래서 내가 밥이 아니라 젖을 먹여 왔노라고.
그 때도 지금도 혈육과의 관계에 있어서
너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고.
아직 그리스도께 속한 신령한 사람이 아니라서
혈육들에게 여전히 시기심을 느끼며
분을 내는 것이라고.
아팠다.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린도전서 4:11)
사도 바울이 물었다.
네 마음의 터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너는 무엇으로 건축을 하고 있느냐고.
금이나 은이나 보석?
아니면 나무와 풀과 짚?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전서 3:16-17)
금, 은, 보석은 성령이고,
나무, 풀, 짚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것이 내게는 자명하다.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 터 위에 성령으로 집을 짓는다.
반면, 육신의 사람은 혈육의 터 위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집을 짓는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여전히 시기심과 경쟁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 내 마음은
아직 성령으로 지어진 집이 아니다.
나는 이제 막 시작하는 어린애일 뿐이다. 큰일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fools”)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린도전서 3:18, 21)
어린애라는 자각이 어린애와 같은 행동을 불러왔다.
마음껏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곧 우는 아기에게 젖을 주러 달려오는 엄마처럼
그분의 말씀이 젠틀하게 임했다.
“모든 만물이 다 너의 것이란다.
네 혈육들이 자랑하는 모든 것이 다 너의 것이란 말이지.
그리고 알다시피,
모든 만물을 소유한 너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란다.
그러니 세속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따라 자랑하는
혈육들 앞에서 기쁘게 어리석은 자가 되렴.
가장 좋은 진리와 성령을 소유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는 지혜롭되,
그들에게는 바보가 되려무나.”
아직 어린애일 뿐인 관계로
그분의 말씀은 지키기에 어렵게 보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말씀이 도착했으니,
일단 순종해보는 수밖에.
그렇게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가 되어보기로 한다.
가장 좋은 것인 진리와 성령을 쫓으며 살기 위해
지혜로운 바보가 되어보자.
키리에 엘레이손!
#Aug. 12. 2022.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