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책, <교회됨>을 읽고.
하나님 이야기가 요구하는 인간상이란, 하나님 이야기가 다원주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도전 받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 이야기를 통해 자기정체성을 지켜가려는 사람들이다. -본서 중에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책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독서를 시작한 직후였다.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도 읽기 어려웠을 테다.
시작은 꽤나 가볍고 만만한 마음이었다. 책 표지 때문이었는지, 비록 저자가 학자일지언정 기독교 일반 대중을 위한 책쯤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곧 폭로된 책의 실체는 기독교 윤리 논문 12편을 모아놓은 논문집이었다. 이성적인 설명과 합리적인 논증으로 점철된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문장들을 400페이지 넘도록 읽는 일은 무턱대고 모래사막을 지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 까지 읽고 나니 알겠다. 그 사막을 지나지 않았더라면, 내 목마름의 정체를 알지 못했을 것이고, 뼈아픈 오아시스 또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자유주의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이야기는 결국 우리는 아무 이야기도 지니지 않은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이야기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는 자유주의가 지닌 강제력을 간과한 나머지, 민주주의에서는 국민들이 지배받기를 “동의”했기 때문에 국민 스스로가 지배자라는 자기기만적 슬로건에 놀아나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주되심에 대한 분명한 교훈을 배운 자들은 “국민”이라는 것이 왕이나 독재자들에 못지않은 폭군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서 중에서
내가 개인주의자라는 사실을 안지는 오래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무려 그리스도인인 내게 지금껏 그것이 큰 도전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동안 익혀왔던 기독교 윤리가 자유주의의 것과 크게 상충되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기독교 윤리 역시 자유주의 윤리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 문제를 일반화하여 추상적으로 다루기는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나는 형이상학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기독교적 관점에서 자율적 자유란 자아에 얽매이는 것이며 자아가 지닌 욕망의 노예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에서 진정한 자유는 우리의 주이시며 궁극적 목적이신 그분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살아가기 즉 주께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다. 보다 전통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은 완전한 복종에 있으며, 진정한 자유는 완전한 섬김에 있다. ... 그리스도인의 도덕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적 확신의 본래적 가치에 속한다. -본서 중에서
자유주의 윤리의 기본 단위는 자유로운 개인이다. 이때 개인은 자의적 욕망을 가진 자로서, 자유주의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합리적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소유를 추구하는 존재, 곧 소비자다. 자유주의 경제 체제의 세상에서 나는 고객님으로 불린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나의 주요한 정체성들 중 하나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게다가 발칙한 세상은 경제와 신용에 따라 고객님의 등급이 나누는데, 나는 냉큼 서민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인터넷에 접속할 때마다 세상은 나에게 서민층에 걸 맞는 온갖 종류의 상품들을 소개하면서 그것들을 소비하는 착한 서민이 되라고 끝없이 압박하고 있다. 그렇게 자유주의 시장은 기독교 전통이 악덕이라고 규정한 나의 욕망을 오히려 덕목으로 변신시키려 조작하는 중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기에 두려움을 연료삼아 폭력의 불길을 지속적으로 태워내는 곳이다. ... 교회는 하나의 국제적 사회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표식이어야 한다. -본서 중에서
개인주의자가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은 실개천이 흘러 강에 합류하는 것과 같다. 강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자유주의자는 다원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인 관계로 나는 절대로 다원주의자가 될 수 없다. 자유주의자들이 편협함을 근거로 제 아무리 손가락질을 할지라도, 내게는 그리스도가 단 하나의 진리다. 자유주의자들과의 결별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던 것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가 십자가를 순종하여 이루어내신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정치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정치의 헌법이 복음이다. 복음서들은 단지 인간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훈련의 매뉴얼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통치라는 실재에 참여하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딜레마의 출발은 바로 이 지점이다. 단 하나의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면서도 나는 꾸준히 개인주의자였다. 사회, 정치, 윤리, 교육, 문화 등에서 자유주의자들과 상당히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교적 신념에 있어서는 완강한 보수주의이나, 그 외의 생활과 실천에 있어서는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와 화목하게 지내다 보니 종종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던 게다.
일단, 책을 통해 문제의 근원을 깨닫게 되었으니 수지맞았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재조정할 필요를 느낀다. 결국, 나는 지금까지 돈독하게 지내왔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서 공동체주의와 전통주의로 회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한 평생 일들 중 하나가 회심이라더니, 진심 옳은 말이다.
이야기는 어리석은 실수까지도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인정하게 하는 수단을 제공할 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이야기 안에서는 어리석은 실수조차도 지속적인 은혜의 대상 즉 “우리의 선 및 모든 교회의 선”을 위해 용서와 변화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깨닫게 해 준다. -본서 중에서
기독교 신념과 가치를 대놓고 표방하던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한 바 있다. 그 시절의 교수들은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이론을 아무런 비판도 없이 가르쳤다. 그런데 스탠리 씨에 따르면, 도덕성 발달 이론은 자유주의의 산물일 뿐, 기독교의 것은 될 수 없다. 콜버그에게 인간은 자율적인 개체로서 자율적인 성취를 통해 스스로를 발달시키는 존재다. 이런 전제 아래서 그는 도덕성을 하나의 발달 과제로 보고, 한 개인이 도덕성이라는 과업을 어떻게 성취하여 발달하는 지를 이론으로 만들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이 권위가 있는 이유는 성경을 통해 자신들이 용서받은 백성인 동시에 용서를 실천해야 할 존재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백성이 된다는 것은 그들의 세상과 구별되게 한다. 권력과 폭력이 역사를 다스린다는 환상을 가진 이 세상은 용서받을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 “세상”이라는 말의 한 부분에는 이 세상이 성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있다. 세상은 용서받음의 기억으로 사는 곳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용서받은 자들의 공동체는 성경에서 찾아낸 내러티브 즉 하나님의 본성이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말해주는 내러티브의 공동체이다. 기억하는 자가 되고자 한다면,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용서가 없다면, 내러티브의 역사를 해체시키거나 최소한 무익한 것이 되도록 망각 혹은 탄압하는 것 밖에 남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은 망각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 공동체의 특성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이를 통한 기억의 방식을 배우는데 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와 불의를 저지르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본서 중에서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인간은 자율적인 개체가 아니다. 삶 역시 자율적인 선택과 성취의 연속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고, 따라서 인간의 삶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발달과 성숙은 원칙과 과업을 성취함으로써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곧 하나님의 이야기에 참여함(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도덕성과 관련해서 기독교는 ‘발달’이 아니라 ‘회개’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물론, 교육학도들에게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이론을 소개해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기독교 교육을 표방하는 대학의 교수라면, 그것이 자유주의 이론임을 확실히 가르쳐주었어야 했다. 그리고 기독교 유아 도덕 교육은 발달적 측면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나이에 따른 죄의 고백(회개)과 죄 사함(용서)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그 과정을 통해 아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닮아가게 할 것인지를 더 깊게 고민할 수 있도록 인도했어야 했다.
우리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권력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 권력들을 인식하고 당당하게 대면할 능력이 없다면, 권력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 통제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삶의 우연적 요소들을 굳이 부인하지 않으면서 선물로 주어진 것들을 신뢰하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본서 중에서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자아란 우리가 만들어낸 그 무엇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이야기의 구현자가 됨으로써 정체성을 얻는다. .. 자아의 정체성은 선택을 통해 형성되지 않는다. 나의 정체성은 이야기 속에서만 인식된다. -본서 중에서
기독교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곧 교회다. 교회는 자율적 선택이 아닌 전통과 기억(역사)으로 존속되어 왔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환대하고 그것을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이방인을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면서 경계하거나 박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인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들을 환대하여 받아들이는 모험을 용기 있게 감행한다. 그리하여 교회는 때로 환난과 고통을 받기도 하지만, 그와는 비교할 수 없게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반면, 개인 중심의 자유주의자들은 이방인을 경계하고 박대한다. 그들에게 이방인이란 자신들의 안전과 질서를 깨뜨리는 위험 요소이자 방해물일 뿐인 까닭이다.
너무도 자주 정치학은 권력, 이해관계, 그리고 기술(technique)의 문제로만 취급되곤 한다. 그 결과 우리는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가 정치에 속한 사람들에게 모험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심어주는데 있다는 점을 잊어버리곤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권력이나 안전보장 혹은 평등, 심지어 인간존엄도 아니다. 공동의 모험에 참여하고 기여함으로써 존재감을 얻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존엄성”은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바로 그 느낌에서 온다. 정치와 모험의 본질적 연관성은 정치가 내러티브적 본성을 지닌다는 점을 인색해야 함을 일깨워 줄 뿐 아니라, 좋은 정치란 용기와 소망을 시민의 핵심덕목으로 요구하는 정치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본서 중에서
책은 지속적으로 공동체가 믿음으로 받아들인 성경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내러티브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내러티브에 캐스팅 되어 충실히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인간의 존엄성도 자존감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홀로 끌고 가는 모노드라마일 수 없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고, 수없이 많은 플롯들이 복잡하게 얽혀 존재하며, 무구한 역사와 광활한 공간을 무대로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대하드라마다. 그 속에서 나 또한 작은 역할로 이야기에 참여하고 있다. 작가이자 감독이신 그분의 디렉션에 따라 그분의 의도대로(성품과 뜻)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고 있다.
성을 사적 도덕의 문제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유주의 정치윤리에 근거하는 정치적 주장이라는 점이다. 기독교의 진정한 성윤리를 되찾으려는 시도들은 성을 “사적” 문제로 간주하는 관점부터 문제 삼아야 한다. -본서 중에서
공동체가 자녀출산을 독려하는 것은 공동체 그 자체 및 구성원들의 자신감의 표시이다. 자녀란 역경과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인생이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미래에 대한 공동체의 표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녀들은 소망의 목적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삶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소망의 상징이다. 인생은 고달픈 것이지만, 살아낼 만하다. 솔직히, 인생이란 남들에게 그렇게 살아보라고 권할 만큼의 열정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 -본서 중에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결혼과 자녀출산의 소명을 자신들의 의무로 생각했다. 그들이 자녀를 갖는 것은, 비록 여러 반대증거들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확신의 가진 공동체의 일원이 되겠다는 서약의 표시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자녀출산 혹은 결혼은 “본성적” 사건이 아니라, 가장 깊은 도덕적, 종교적 중요성을 담은 것이었다. _본서 중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도덕적인 것이 되려면, “우리의 정체성”, 즉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호소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유주의는 도덕적으로 다원화된 사회에서 협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주장들을 배제하고 싶어 한다. 자유주의는 특정한 행위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말할 때,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와 동떨어진 “이론”을 철학적 근거로 제시하려 한다. 인간이란 이성적이어야 한다거나 혹은 공정해야 한다는 정도로만 인간됨의 문제를 말할 뿐이다. 하지만 햄프셔가 말한 것처럼, 이러한 이론들은 생명을 앗아가거나 성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진실 말하기 등등에서 도덕명령이 수행하는 기능을 무력화시킨다. -본서 중에서
책을 통해 배운 중요한 태도는 어떤 질문(성, 낙태, 출산 등에 관한)이든 그대로 받아들이는 나이브함을 경계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질문은 충분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질문 자체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공동체적 입장에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다시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나아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질문일수록 특별하고 구체적인 질문으로 번역하여 현실에 적실한 것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한다. 만일 그런 능력을 갖게 된다면, 교회는 복잡한 사회 윤리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지혜로운 대답을 찾게 될 것이다.
오랜만에 공부하듯 열심히 읽었다. 쉬운 책이 아니었기에, 눈과 머리뿐만 아니라 손도 부지런히 거들어야만 했다. 줄들을 긋고, 팝 업 되는 생각들을 메모하고, 하이라이트를 덧입히고, 색색의 라벨을 붙여가면서 노동하듯 읽었다. 그 과정에서 논문이라는 형식 그대로 출판을 고집했던 저자의 선택이 옳았음을 느꼈다. 지금껏 견지해왔던 생각들을 향해 그것은 틀렸으며, 다시 재고하고 조정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훈계하는 책이었기에, 대놓고 정색하면서 어렵게 얘기한 것은 꽤 영리한 결정이었다. 어려운 문장들 앞에서 독자는 자신의 무식을 대면할 수밖에 없다. 겸손한 독자는 저자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 열심히 읽을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저자의 말을 끝내 받아들이기 쉽다.
마음이 시큼해진다. 이 나이에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억울하다는 생각도 슬쩍 들고, 귀찮다는 생각도 엉겨 붙는다. 그러나 알아버린 것을 어쩌겠는가? 누가 나를 이 지긋지긋한 자유주의의 손아귀에서 구해낼까? 키리에 엘레이손!
#Aug. 6. 2022.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