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긴고아
나의 긴고아
손오공의 머리에는 긴고아라는 테가 둘러져있었다.
요괴였던 손오공을 제압하고 통제하기 위한 일종의 족쇄였다.
삼장법사가 긴고주를 외우면
긴고아는 손오공의 머리를 조이며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손오공이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긴고아를 제거하려 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아이러니하게도 긴고아를 없애고자 하는 욕망이 사라졌을 때,
그것은 비로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불행히도 요괴 손오공은 내 안에도 있다.
녀석의 정체는 업적주의와 성취주의.
녀석은 경쟁을 좋아하며,
이기는 것은 배나 좋아한다.
들끓는 힘을 주체할 수 없는 요괴는
평온한 마음을 어지럽히며 분노와 불안과 두려움을 일으킨다.
하지만 내게는 긴고아 또한 있다.
주께서 보내신 성령께서 녀석에게 하사하신 것이다.
내 첫 사역지의 리더는
애석하게도 전형적인 업적주의자요, 성취주의자였다.
그는 끊임없이 성장을 요구하며 압박했다.
그가 강요한 성장이란 눈으로 확인 가능한 양을 뜻했고,
그것은 숫자와 통계로 확인할 수 있는 종류였다.
말하자면, 나는 각인되었다.
그래서 목회 사역을 하는 동안 나는
숫자와 합계에 연연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출석 인원의 합계와 헌금의 총계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그것의 많고 적음에 따라 우쭐해 하거나 불안해하곤 했다.
불행한 날들이었다.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그 외에 남종과 여종의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말이 칠백삼십육이요 노새가 이백사십오요
낙타가 사백삼십오요
나귀가 육천칠백이십이었더라
(에스라 64-47)
1차 포로귀환으로 돌아온 자들은 42,360명.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안정된 삶의 기반을 포기하고
척박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를 선택한 자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남은 자들’이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남은 자들을 통해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남은 자들의 디폴트는 적음이다.
그들은 언제나 적다.
그러나 적을지라도 부족하지 않은 것이 또한 남은 자들이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선지자 7000명과 같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아도,
자기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충성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넉넉히 이루어 가신다.
그 아침에 에스라는 포로 귀환 명단과 가축들을
빠짐없이 적고, 꼼꼼하게 계산하여 보고했다.
잊고 있었던 숫자와 합계를 듣고 있을 때,
갑자기 긴고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 안의 요괴가 그것을 붙들고 괴로워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창피한 일이지만, 나는 실패한 사역자다.
하나님의 남은 자들을 숫자와 통계로 환원하여
업적과 성취를 가늠하려 애썼던 까닭이다.
손오공을 내 안에 무례하게 입장시킨
첫 리더에 대한 원망이 없지 않다.
그러나 요괴를 받아들인 장본인은 다름 아닌 바로 나다.
그 때는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다고
항변을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손오공에 대해 책임은 오롯이 내게 있을 뿐이다.
물론, 남은 자들을 숫자와 통계로 축소시켜,
그것을 업적으로 삼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때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실패하지 않은 적도 없었다.
실패는 언제나 탈진을 낳았고,
탈진은 사직의 이유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네 번의 사표를 던지면서
네 번의 실패를 꼼짝없이 당했다.
만약 처음부터 남은 자들의 디폴트가 적음임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성취주의와 업적주의라는 손오공의 파괴력이
얼마나 막강하고 끈질긴지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조금 더 의롭고 의미 있게,
심지어 즐겁게 사역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 번 들인 손오공을 박멸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비록 숫자와 통계와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는 지금은 조용할지라도,
언젠가 숫자와 통계의 현장에 입장하게 되면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또다시 마음을 참혹하게 짓밟아 놓을 것이 뻔하다.
그럼에도 지레 겁을 먹지 않기로 한다.
어차피 녀석의 머리에는 긴고아가 채워져 있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죽도록 괴로워하면서
자기 부인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업적주의와 성취주의에서 벗어나게 할꼬?
에스라의 포로 귀환 숫자,
그 남은 자들의 숫자가 과연 나를 해방시켜 줄 수 있을까?
고통스러운 말씀이
오히려 나를 살리는 말씀이 되나니!
키리에 엘레이손!
#Jul. 2. 2022.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