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지기들 2021. 12. 11. 11:32

 

 

 

 

 

리처드 애덤스의 소설, <Watership Down>을 읽고.

 


그러니까 우리는 동갑내기인 셈이다. 

이 책, <워터십 다운>의 출판이 1972년에 시작된 것이다. 

각자 다른 곳,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 똑같이 나이를 먹어가다가 

오십 년쯤 뒤에 우리는 문득 만났다. 


지금껏 악착같이 살아남은 것을 보니, 

지속적으로 사랑을 받아왔음에 틀림이 없었다. 

물론, 사랑을 받아온 까닭은 책속에 담겨 있을 테다. 

그리하여 나는 7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이 주는 무게감을 견디면서 

한 페이지씩 읽어나갔고, 마침내 이 작품이 사랑받아온 이유를 목격하였다. 


‘무슨 이깟 토끼 얘기가 이토록 흥미진진하고 손에 땀을 쥐게 만들어?’

 


장르는 판타스틱 어드벤쳐(Fantastic Adventure)로, 

히어로(Hero) 물이 아니라 팀플레이(Team-play) 물이다. 

이 때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토끼다. 

책 속 토끼들은 이솝 우화처럼 완벽하게 의인화된 

토끼 가죽을 뒤집어쓴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토끼 본연의 특징을 고수하되, 

토끼만의 특별한 언어와 신화(이야기)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어린 아이가 사회화되듯 토끼들이 의인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는 특별한 사전, 

즉 토끼어 사전을 참조하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ㅋ


모험물인 관계로 이야기 진행은 시간 보다는 장소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각각의 장소들은 얼마나 전형적이고 풍유적인지!) 

이야기의 시작은 주인공 토끼들의 고향인 샌들포드 마을로부터다. 

철저한 계급 사회를 특징으로 하는 샌들포드를 떠나는 것은 

예언자 파이버의 묵시적 계시 때문이다. 

파이버의 계시를 귀 기울여 들었던 리더 헤이즐이 

행동대장 빅윅, 이야기꾼 댄더라이언, 책사 블랙베리 등과 함께 

막연한 모험의 길을 떠난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가 워터십 다운인 것도 모른 채, 

그들은 묵시적 재난을 피하기 위해 무작정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그 중간에 그들은 토끼 본연의 야생성을 잃고 

편안하게 먹고 사는 것에 길들여진 토끼들의 마을인 카우슬립을 지난다.


카우슬립을 거쳐 도착한 워터십 다운에서도 그들의 모험은 끝나지 않는다.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암토끼를 

워터십 다운에 들이는 모험을 감행해야 했던 것이다. 

암토끼 수송 작전의 무대는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통제하는 에프라파다. 

그곳은 독재자 운드워트에 의해 장악된 곳으로 

그는 토끼다움을 잃은, 말하자면 소시오패스 토끼다. 

물론, 이야기는 목숨을 건 워터십 다운의 토끼들이 운드워트를 물리치고, 

워터십 다운을 무사히 지키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이 때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은 에프라파 마을에도 자유와 평화가 임했으며, 

나아가 워터십 다운과 에프라파 토끼들로 구성된 

또 하나의 토끼 마을인 시저스 벨트가 세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특별히 애정이 가는 캐릭터는 역시나 헤이즐이다. 

뭐 하나 특출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누구에게든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면서 

긍휼을 베풀 줄 아는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래서 파이버의 계시에 귀 담아 들었던 것이고, 

심지어 갈매기와 들쥐에게 조차 긍휼을 베풀어 주었던 것이다. 

다른 종(種)과의 사귐은 누구나 할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일인데, 

이러한 헤이즐의 폭넓은 사귐을 통해 

워터십 다운 공동체는 큰 도움을 받게 된다. 

역시나 리더의 탁월함은 재능이 아니라 성품에 있는 것이다.


자기 자리에서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던 빅윅, 

그리고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해올 때마다 적절한 이야기로 

공동체 구성원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던 댄더라이언 역시 

눈여겨보았던 캐릭터였다. 

특별히 책 속에는 토끼들의 전설 속 영웅인 

‘엘-어라이라’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신화적 이야기가 사회 안에서 어떤 가치와 역할을 하는지 

퍽 잘 보여주고 있었다.

 


책을 홍보해야하는 입장을 고려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버금가는 작품이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조금 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만큼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은 개인적으로 퍽 생소한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년 가까이 살아남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정말 재밌었으니까!


이 책은 내겐 조금 다른 이유, 

그러니까 매우 사적인 이유로 오래도록 기억될 듯싶다. 

난생 처음으로 돋보기를 걸고 읽은 책으로 말이다. 

돋보기를 끼고 독서했던 경험은 뭐랄까, 

유사 바디메오 경험이었다. 

활자가 그토록 크고 깔끔하게 보이는 것이었다니,

할렐루야다!ㅋㅋ

 

 



#Dec. 11. 2021.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