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따지거나 덮거나

창고지기들 2021. 11. 20. 11:37

 

 

 

 

따지거나 덮거나

 


우리 편에서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들 편에서는 문화적 행위였다. 

그들의 거짓말은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자,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기(책임지지 않기) 위해서이자, 

자기 게으름과 무능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인정하면 진짜 게으르고 무능한 자가 됨으로) 하는 일종의 처세술이었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만났던 사무직원들은 대부분 그랬다.


그들은 천연덕스럽게 너희가 요청한 일들은 

처리되는 중이니 기다리라는 말만 계속해서 되풀이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사실은 시작한 적도 없다고 말을 바꾸곤 했다. 

뒷목을 붙잡으면서 왜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냐고 따져 물으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 걸 가지고 따진다고 도리어 불쾌해하던 그들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적반하장도 유분수’ 카드를 들고 끝까지 맞서기도 했다. 

그러나 불리해지는 쪽은 항상 우리였다. 

게다가 신경질적으로 시시콜콜 옳고 그름을 따지다보니, 

마음은 삭막해지고 일상은 척박해져만 갔다. 

기쁨을 잃어버린 삶, 

그것은 더 이상 신앙인의 삶이라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4:8)


시간은 알뜰한 것이어서, 그것의 잔고가 쌓이자 

그들의 말과 행동에 대한 이해 수준도 조금씩 늘어갔다. 

옳고 그름의 눈초리를 거두고, 

사랑의 눈길로 그들을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끔이나마 마음에 온기가 돌고, 일상에 윤기가 감돌았던 것은 

정의구현의 의지가 아니라 사랑의 의지 덕분이었다.

 

 

(엘리바스의 두번째 발언)
지혜롭다는 사람이, 

어찌하여 열을 올리며 궤변을 말하느냐? 

쓸모없는 이야기로 논쟁이나 일삼고, 

아무 유익도 없는 말로 다투기만 할 셈이냐? 

정말 너야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내던져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뉘우치며 기도하는 일조차 팽개쳐 버리는구나.

(욥기 15:2-4/새번역)


애초에 엘리바스는 위로하고자 하는 사랑의 이유로 욥을 찾아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사랑꾼은 어디가고 꼬치꼬치 따지는 쌈닭이 되어버린 그다. 

쌈닭 엘리바스가 욥에게 제공한 것은 위로와 격려가 아닌 비난과 정죄였다. 

자신의 옳음과 욥의 그름을 공공연하게 하기 위해 

그는 영혼을 베는 날카로운 말과 가시 돋친 논리에 손을 댔다. 

고통만 가중시키는 민폐 친구의 마음에 사랑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다. 

위로라는 선의가 그토록 쉽사리 악의로 돌변하다니, 

진짜 친구가 세상에 귀한 이유겠다.

 


얼마 전, 또 다른 묵상 원고를 집필할 기회가 찾아왔다. 

급작스럽게 시작되었으되, 마감일이 며칠 남지 않아 전력을 다해야 했다. 

소액의 원고료가 흔한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데일리 원고에 비해 3-4배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원고료가 턱없이 싼 소모임 원고를 쓰면서는 나도 모르게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완성된 원고를 보낼 때, 

다음번 원고 청탁 때에는 소모임 원고를 맡겨주지 말아달라는 의중을 함께 담아 보냈다.


대차게 메일을 보냈으나, 어쩐 일인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던 중 19년째 원고를 쓰고 있는 곳 역시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데도 이쪽의 일은 비난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는데, 

저쪽 일은 비난하면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대체 이유가 뭘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엘리바스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 쳤다.


“이유가 뭐긴, 사랑하지 않아 서지.”

 

그러고 보니, 19년 동안 이쪽과 일하면서 별의 별일이 다 있었다. 

그 긴 세월 동안 나는 얼마나 비판하고, 비난하고, 정죄해왔던가! 

이제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서, 

뭘 요구해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는 나다. 

최근에는 사전에 양해도 구하지 않고 

원고 분량을 대폭 삭감해서 원고 청탁을 해왔는데, 

이제 막 입사한 새로운 편집자의 농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부당한 대우는 내게 받아들이기 힘든 종류가 아니었다. 

곧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이 쉽사리 들었다. 

결국, 나는 이쪽의 일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저쪽과의 관계는 이제 시작이다. 

아직 사랑은 무리다. 

함께 일하기 위해서 당분간은 옳고 그름의 근거와 논리를 조율하게 될 것이다.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판단하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뿐일 테지만, 나는 알고 있다. 

쏜살같이 지나감에도 분명히 쌓이기도 하는 시간의 신비 속에서 

사랑이 뿌리내려 움트고 자라면, 

결국 저쪽 역시 착취하는 곳에서 동역(同役)하는 곳으로 변신하고 말 것임을.

 


깐깐하게 따지는 대신에 

너그럽게 덮어줄 수 있을 때까지 

사랑의 왕이시여,

사랑을 넉넉하게 부어주옵소서! 

키리에 엘레이손!

 

 

 


#Nov. 20. 2021.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