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장수하는 자에게 있는 명철

창고지기들 2021. 11. 13. 11:57

 

 

 

 

 

장수하는 자에게 있는 명철

 


믿음과 현실 사이의 불협화음, 불일치가 생길 때 인지부조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해결을 향하여 전력질주를 하게 한다. 

현실을 무시, 부정, 혹은 합리화 하든지, 아니면 믿음을 수정 혹은 유기하든지 간에, 

어쨌든 해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 인간 인지의 습성인 것이다.


소발의 하나님은 권선징악의 하나님이다. 

그의 하나님은 착하고 선한 일은 권장하되 악은 반드시 징계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갑자기 인지부조화 케이스가 발생한다. 

욥이 고난을 받게 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욥은 가까운 친구이자, 자타 공인 최고의 사람이다. 

신앙, 인품, 지혜, 지식, 축복 등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완벽한 친구다. 

그런데 바로 그 최상급 사람이 전대미문의 고난을 받고 있다. 

대체 왜?


욥의 고난 앞에서 소발은 고꾸라졌다. 

쓰러진 채 꼬박 7일 낮밤을 끙끙거렸다.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지만,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인지부조화 상태로 버둥거리고 있을 때, 

마침 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죄 없이 고난을 받고 있는 자신의 탄생을 저주하며, 

죽기를 간청하는 친구의 하소연을 듣다가 소발이 벌떡 일어났다. 

거침없는 말이 쏟아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Oh, how I wish that God would speak,
that he would open his lips against you
and disclose to you the secrets of wisdom,
for true wisdom has two sides.
Know this: God has even forgotten some of your sin.
(Job 11:5-6)

 


소발에 따르면 욥의 고난은 그의 죄에 비하면 가벼운 축에 드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죄들 중 얼마를 잊어버리셨기 때문에, 

그나마 이정도로 경감된 고난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권선징악이라는 신학’과 ‘의인의 대명사인 욥의 고난’이라는 

인지부조화를 해결하는 소발의 방법이었다. 

악인은 반드시 처벌 받는다는 신념에 따라 욥을 죄인으로 간주하고 정죄했던 것이다. 

아무 죄가 없던 욥으로선 억울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욥의 고난은 죄의 증거가 아니라 의로움에 대한 증거일 뿐이다. 

그런데도 소발은 자기 신학의 옳음을 고수하기 위해 허위 사실을 날조하여 욥을 고발했다. 

이는 무고죄다. 

죄 없는 자를 확실한 죄인으로 몰아붙였으니, 그의 죄가 작지 않다. 


만일 욥이 자기 고난을 재빨리 해결할 목적으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인정했다면 어땠을까?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애걸복걸했다면 어땠을까? 

지은 죄가 없었기에 내어줄 용서도 없을 하나님은 퍽 난감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욥은 정직한 사람답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면서 기존 신학을 교정하는 쪽으로 인지부조화를 해결하려했다.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욥기 12:6)


위의 욥의 말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계략과 명철(욥기 12:13)은 다음과 같은 동사들로 연결된다. 

헐고, 가두고, 막고, 뒤집고, 속이고 속고, 끌려가게 하고, 어리석게 하고, 넘어뜨리고, 

무시하고, 판단력을 빼앗고, 멸시하고, 힘 빠지게 하고, 비밀을 폭로하고, 

죽게 하고, 망하게도 하고, 무지하게 하고, 방황하게 하고, 

더듬거리게 하고, 비틀거리게 하고.(욥기 12:14-25)


이는 소발의 신학, 곧 하나님이 세우시고, 해방시키시고, 정직하시고, 

지혜로우시고, 존귀하게 여기시고, 정확히 판단하시고, 존중하시고, 

힘주시고, 살리시고, 승리케 하시고, 영리하게 하시고, 목적지까지 정확히 안내하시고, 

확신에 거하게 하신다는 것과 정확히 반대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악인뿐만 아니라 

의인에게 조차도 고난을 허락하실 수 있다는 것이 욥의 교정된 신학일 것이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은 있어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 현실이고 인생이다. 

그 사이에 인지부조화는 독초처럼 피어난다. 

독이 때로 명약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은 알려진 바다. 

많은 경우 믿음의 급격한 성장은 인지부조화 상황 속에서 일어난다. 

인지부조화라는 고초를 겪으면서 훌쩍 자라는 것이 믿음이다.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욥기 12:12)


살면서 인지부조화를 숱하게 경험해온 나이든 자에게 지혜와 명철이 있다는 말은 옳다. 

믿음과 현실의 불일치로 인한 불편함을 근면히 해결하거나, 극복하거나, 

혹은 신비로 남겨놓거나 하면서 어쨌든 온전히 통합하면서 살아왔던 자에게는 지혜가 있다.


어린 자녀들은 쉽게 분노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게 말이 돼?” 


장수하는 자는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게 현실이고 인생이란다.”


어느새 장수하는 자의 미소가 얼굴에 조금씩 번지고 있다. 

믿음과 현실의 불일치가 발생할 때, 재빨리 해결하려 하고 조급해하지 않는다. 

심리적 자동 기제들이 제멋대로 출동을 서두를 때면, 

진정하라고 호통 치는 무엇도 생겼다. 

굳이 무리하게 해결하는 대신에 

신비로 남겨둘 줄 아는 공간도 조금씩 늘어나는 중이다. 

무엇보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늘 상주하고 있다. 

그래서 확신이나 자신감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나, 

과신(過信)으로 인한 재난으로부터는 훨씬 안전해졌다.

 


믿음은 백퍼센트의 확신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거짓 믿음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온전한 믿음은 의심과 회의를 먹고 자란다. 

의심과 회의가 클수록 믿음도 커진다. 

이 역설적 신비 속에서 나의 믿음이 꾸역꾸역 자라는 중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Nov. 13. 2021.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