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지파의 외식
단 지파의 외식
꿈이 있는 여호와셨다.
그분에게는 이스라엘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으면서 영원히 사는 꿈이 있었다.
그것이 이스라엘을 지어낸 이유였다.
그러나 애초부터 쉽게 이루어질 소망은 아니었다.
손쉽게 이루어질 바람이었다면 꿈꾸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모 뜻대로 될 수 없는 것이 자식인 것처럼,
이스라엘 역시 여호와의 소망, 그분의 뜻을 받들지 않았다.
올챙이 적 기억을 못하는 개구리, 이스라엘이 꼭 그랬다.
그래서 자신들을 지은 여호와의 창조 목적을 슬금슬금 유기했다.
그들은 창조주 여호와를 일상생활에서 쫓아낸 뒤, 종교 안에 그분을 가두고 문을 잠갔다.
온 세상을 지으신 여호와를 종교적 신으로 축소시켰다.
이윽고 신상품 우상들이 봇물 터지듯 이방 나라들로부터 이스라엘에 대거 수입되었다.
결국 여호와는 케케묵은 구닥다리 신,
신들 사이의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17:6)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절, 사사기는 그런 시대였다.
그럼에도 율법은 엄연히 남아있었다.
지켜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여호와의 왕권을 인정하는 이가 없었기에,
누구도 그분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왕권을 빼앗은 뒤, 실로의 성막에 가두어놓았다.
그리고는 간간이 제사를 드릴 때를 제외하고는 그분을 전혀 찾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이방인들의 법을 따라 부지런히 농사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갔다.
죄의 대가로 고난을 당할 그 때에야 최후의 방법으로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속히 와서 자기들을 구원해달라고,
당신의 전능하신 왕권으로 자기들을 다스려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면 다정이 중병이신 여호와는 갇혀있던 실로의 성막에서 분연히 나오셨다.
자기 이름으로 세운 사사를 통해 그들을 구원해주셨다.
그러나 그 때뿐이었다.
구원받고 다시 평안해지면, 또다시 여호와를 실로의 성막에 가뒀다.
여호와의 율법이 아니라 가나안의 법을 지키면서 부지런히 죄를 지으면서 살았다.
그들의 죄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신속히 쌓여 태산이 되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사사기 18:1)
이스라엘이 왕이 없던 시절,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던 그 시절, 단 지파에는 기업이 없었다.
아니, 여호와로부터 기업으로 받은 땅을 아모리 족속 때문에 차지하지 못하게 되자,
그것을 포기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여호와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까닭에,
단 지파는 여호와께서 주신 땅을 스스럼없이 포기했다.
단 지파는 강제로 여호와의 왕권을 빼앗은 후,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래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땅, 자기 기업을 찾아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들은 온갖 거룩한 시늉은 다 냈다.
가나안 정탐꾼 시늉, 여호와께 전쟁의 승패를 묻는 시늉,
여호수아와 갈렙이 했던 위대한 믿음의 선포 시늉 까지(사사기 18:2,5,9-10).
어쩌면 그들은 그 옛날 모세의 거룩한 시대를 재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재현은 한낱 모조품 거룩이었다.
제 아무리 그럴 듯해도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단 지파가 벌인 전쟁은 가나안 정복 전쟁과는 달리 성전, 곧 거룩한 전쟁일 수 없었다.
단 지파의 전쟁은 불법한 침략과 약탈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 경계를 넘어 남의 땅을 무단으로 침입하여 선량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그들의 성을 빼앗고 약탈한 짓(사사기 18:27-29)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불법을 행하는 행악자일 뿐이다.
여호와께서 주신 땅에 머물면서 어떻게든 아모리 족속을 굴복시켜 그 땅을 차지해야 했건만,
단 지파는 자기 뜻대로,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땅을 골라 야비하고 잔혹하게 차지해버렸다.
그것도 무슨 거룩한 전쟁이라도 되는 양 가짜 거룩에 취한 채.
이 모든 것이 여호와를 자기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경계선 침범, 그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쉽게 저지르는 잘못이다.
단 지파가 자기 집이 아닌 미가네 집을 침범하여 제사장과 신상을 빼앗고(사사기 18:19-20),
자기 땅이 아닌 라이스 성을 침략하여 빼앗았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결과였다.
그렇다면 바운더리(boundary), 곧 경계선을 인정하고
그것을 침범하지 않는 것은 여호와를 왕으로 인정하는 자들의 마땅한 모습이다.
모든 관계에는 지켜야할 경계가 있다.
가장 가까운 부부 관계나 부모자식 관계에도 경계는 존재한다.
그것을 존중하면서 지키면서 지속적으로 깊이 관계할 때,
그것을 가리켜 사랑의 관계라고 말한다.
오래전에 만났다 헤어진 그녀는
기도와 대접하기에 힘쓰는 자타공인 훌륭한 신앙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 기억 속 그녀는 다르다.
분명 기도와 대접을 잘 했으나, 동시에 경계선을 함부로 침범하기도 했다.
기도와 대접이라는 미명하에 그녀가 저질렀던 무례한 요구와 정죄와 단죄를 경험했던 것이다.
그녀의 경계선 침범을 두세 번 경험한 직후, 그녀와 거리를 두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녀의 외식에 속아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다.
다행히도 그 누군가의 상처를 어루만져 보듬을 기회를 주께서 허락해 주셨다.
나의 이웃은 내 땅과는 전혀 다른 땅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내게 땅을 허락해 주신 분이 그들에게도 각자의 땅을 허락해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자라면
그들의 땅, 그들의 바운더리를 존중하고 지켜줄 수밖에 없다.
그럴 듯한 단 지파의 외식에 속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잘 보이는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잘 보이지 않는 이웃을 대하는 태도, 곧 이웃의 바운더리를 존중하고 지켜주는 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경외하는 자들인 것이다.
#Oct. 2. 2021.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