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언어
송은혜의 책, <음악의 언어>를 읽고.
이것이 무엇이냐?
만물이 지닌 최고의 진면목을 알게 하는 귀띔……, 은유라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말, 본서 중에서
나는 성경 묵상가다.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을 묵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숱한 선택하며 지난하게 지나가는 중이다.
성경 묵상을 업으로 삼은 양 살다보니, 다채로운 은유가 삶에 꼬인다.
그 중 하나가 음악이다.
개인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는
피아노와 기타, 드럼과 장구가 고작이지만,
그래도 노래가 그중 제일 나은 편이다.ㅋ
그럼에도 중심 되는 악기 하나를 굳이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내 자신, 그러니까 나의 몸과 마음(지, 정, 의)과 말과 행동의 총체를 고를 것이다.
나를 연주할 수 있는 세상 유일한 연주가는 오직 나뿐이니 말이다.
나의 악보는 성경이다.
나는 매일 그것을 귀 기울여 읽고,
거룩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구절들 사이의 텅 빈 공간들을 해석한 뒤
그것을 내 삶에 들여 연주한다.
말씀으로 그려낸 악보를 내 삶의 지평에서
내 몸과 마음으로 연주하며 음악을 플레이한다.
게다가 나와 같이 자신을 악기 삼아 말씀을 연주하는 자들과 함께 모여
같은 본문(악보)으로 앙상블을 연주하기도 한다.
내 업에 대해 음악의 은유로 어렴풋이 이해해온 지 오래다.
그러던 중에 <음악의 언어>를 만났다.
묵상에 대한 음악적 은유가 한층 더 풍성해졌음 물론이다.
기분 좋은 일이다.
#1.
책을 통해 즐겨마지 않았던 성경 묵상에 대한 음악적 은유는 다음과 같다.
같은 작품을 연주한 수많은 음반이 있는데도
오늘 내가 다시 그것을 연주하는 이유는 ‘지금의 나’라는 독특한 시공간 속에서
새롭게 해석될 작곡가의 숨겨진 내면이 작품 안에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서 중에서
=지금껏 동일한 본문 말씀을 수도 없이 묵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가 다시 그것을 묵상하는 이유는 ‘지금의 나’라는 독특한 시공간 속에서
새롭게 해석될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말씀 안에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곡가가 듬성듬성하게 남겨놓은 알 듯 말 듯한 상징들 사이를 헤매다가
음과 음 사이, 비어 있는 공간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결정하고 소리로 구현해야만 한다.
해독을 마쳤다면 결정은 연주자의 몫.
결국 상징과 상징 사이의 빈 공간에서 연주자의 창의성이 피어나는 셈이다.
-본서 중에서
=하나님께서 듬성듬성하게 남겨놓으신 알 듯 말 듯한 뜻들 사이를 헤매다가
단어와 구절들 사이, 비어 있는 공간에서 깨달은 바를 말과 행동으로 순종해야만 한다.
말씀에 대한 묵상을 마쳤다면 결단은 묵상가의 몫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빈 공간에서 묵상가의 창의성, 곧 거룩한 상상력이 피어나는 셈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생겼고, 다른 성격을 가졌으며, 다른 삶을 산다.
곁눈질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에 충분히 집중한다면
작곡가의 생각은 나의 색체를 입은 소리로 되살아난다.
-본서 중에서
=우리는 모두 다르게 생겼고, 다른 성격을 가졌으며, 다른 삶을 산다.
곁눈질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에 충분히 집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색체를 입은 소리, 곧 성육신하여 되살아난다.
생트 콜롱브가 말하는 ‘음악가’는 음악으로 먹고사는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음악으로 사고하며 삶을, 감정을 음악이라는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일상의 경험을 소리로 옮기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낱낱이 살피고 되새기는 사람이다.
한 음 한 음을 우리 각자에게 의미 있는 음악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렇게 음악에 스민 누군가의 삶이 우리가 듣고 싶은 음악이다.
-본서 중에서
=‘묵상가’는 묵상으로 먹고사는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말씀으로 사고하며 삶을, 감정을 말씀의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말씀과 함께 일상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낱낱이 살피고 되새기는 사람이다.
한 말씀 한 말씀을 의미 있는 말씀으로 만들어낸,
말씀에 스민 누군가의 삶은 그리스도인들이 흠모하는 인생이 된다.
악보라는 기호는 너무나 성글어서 연주자는 온갖 상상력을 발휘하여
악보의 빈 곳을 채우며 최종적인 소리를 만들어야만 한다.
연주자의 모든 사사로운 결정이 소리에 투영된다는 뜻이다.
-본서 중에서
=성경 말씀은 너무나 불친절해서 묵상가는 온갖 상상력을 발휘하여
말씀의 빈 곳을 채우며 최종적인 해석을 해야만 한다.
각 묵상가들의 독특한 전인격적인 측면이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순종에 투영된다는 뜻이다.
전문 연주자가 자신의 작품을 마지막까지 매섭게 다듬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감지할 수 있는 영역이 남들보다 넓고 깊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어두운 눈과 귀로는 감각하기 어려운 영역을 표현하기에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이성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우아하고 따스한 위로를 받는다.
-본서 중에서
=묵상에 오래도록 몸을 담가온 묵상가가 마지막까지 매섭게 자신을 몰아치는 이유는
마음에 대해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남들보다 넓고 깊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어두운 눈과 귀로는 감각하기 어려운 영역까지 감지하는 예민함 때문에,
묵상가들의 나눔을 들으면 우리는 이성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우아하고 따스한 위로를 받는다.
#2.
다음은 책에서 누렸던 신학에 대한 음악적 은유다.
연주하며 다른 것을 살피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기계 따위가 자신의 음악성을 제한할 수는 없다고 항변하곤 한다.
노력의 시간을 건너뛰고 신속하게 자기만족을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
메트로놈은 단지 불편하고 멍청한 똑딱이일 뿐이다.
-본서 중에서
=누구나 제한 없이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 성경 묵상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노력 없이 직관적으로 묵상하며 신속하게 자기만족을 즐기려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에게 신학은 불편하고 멍청하고 고리타분한 교리일 뿐이다.
시간을 작품 안에 배열하고,
공들여 음표를 새겨 넣어서 특별한 시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음악 예술이다. …
빨라지거나 느려진 템포는 어디에선가
반드시 원래의 속도를 회복해야 탄력 있고 우아한 음악이 된다.
-본서 중에서
=그러나 말씀을 현재의 시간에 들여 성취해내는 묵상가의 삶에 신학은 매우 필수적이다.
때로 빨라지거나 느려질 수 있는 말씀의 성취는 자칫 오해와 원망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신학적 확증이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불안한 일상에서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으며,
불편한 오늘을 우아하게 살 수 있다.
#3.
다음은 책을 통해 발견한 설교에 대한 음악적 은유다.
작곡가는 자신이 그리는 북극을 악보에 담고,
연주자는 악보를 지도 삼아 북극으로 향하는 속도를 정한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그곳으로 달려가는 속도는 작품마다 다르고, 연주자마다 다르다.
듣는 이는 자신이 타고 있는 ‘현재’라는 기차에서 음악을 들으며 북극을 꿈꾼다.
기차의 속도는 끝없이 변한다. 중요한 것은,
그 음악을 듣는 동안 사람들은 자기만의 북극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본서 중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그리는 하나님 나라를 성경에 담고,
설교자는 성경을 지도 삼아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여정을 인도한다.
한정된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로 달려가는 여정은
성경 각권 마다 다르게 표현되고 있고, 설교자마다 다르게 전해진다.
회중은 자신이 타고 있는 ‘교회’라는 기차에서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 나라를 꿈꾼다.
역사의 상황은 끝없이 변한다.
중요한 것은, 그 설교를 듣는 동안 회중들이 하나님 나라로의 여정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4.
마지막으로 책을 통해 얻은 묵상 나눔에 대한 음악적 은유다.
내가 지금 주선율을 연주하고 있는지, 주선율을 보조해야 하는지,
그 선율과 대등하게 대화를 주고받아야 하는지,
앙상블의 일부로서 나의 역할을 가늠하고 그에 맞는 연주 방법을 찾는 것이다. …
존재감이 강한 주인공보다는 전체의 균형과 색체를 조율하며
타인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의 자리.
은밀하게 상황을 조정하는 재미가 있는 역할이다. …
앙상블을 연주하면 듣기 실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
내가 듣는 타인의 소리와 타인이 귀 기울이는 나의 소리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음향은 축제와 같다. …
내 소리만 들리도록 욕심내면 음악은 깨진다.
나의 역할을 철저하게 분석해서 내가 드러나야 할 부분과
남이 드러나야 할 부분을 머릿속에 정확히 새겨두어야만 입체적인 연주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
다른 의견을 내는 용기와 그로 인한 갈등까지도 음악의 재료로 탁월하게 쓸 때,
악보를 넘어서는 미세하고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음악이 화합의 상징인 까닭은 모두 한목소리로, 한 가지 방법으로 노래해서가 아니다.
서로의 다름이 다양한 방법으로 어울리기 때문이다. …
타인은 지옥이라 했던가?
앙상블에서 타인은 내가 보지 못하는 저 너머의 세계를 가져다주는 선물 같은 존재다.
타인은 또 다른 음악이다.
-본서 중에서
=묵상 모임에서 중요한 것은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다.
잘 듣고 난후,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를 고려하면서 나눠야 한다.
서로 잘 듣고, 잘 말할 때 묵상 나눔은 축제와 같을 수 있다.
또한 나눔 중에 일어나기도 하는 갈등 역시 묵상 앙상블을 위한 재료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다름과 다양성이 일으키는 자연스러운 화학작용이 갈등의 본질이다.
다름과 다양성은 조화롭게 조율되기만 하면,
모임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해질 수 있다.
갈등이 성장을 가져올 때,
서로 다른 다양한 지체들은 저 너머의 세계를 가져다주는 선물이 된다.
음악은 어울리는 음과 어울리지 않는 음으로 이루어진다.
아니, 이 문장은 틀렸다. 그 어떤 음도 서로 어울릴 수 있다.
-본서 중에서
=공동체는 어울리는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아니 이 문장은 틀렸다.
그 어떤 사람도 서로 어울릴 수 있는 곳이 공동체다.
#5.
책의 시작(끝도 역시!)은 베토벤이었다.
독서를 시작하자마자 자연스레 의문이 생겼다.
동네 음악 선생님을 자처하는 저자가 하고 많은 음악가들 중에서
하필이면 베토벤을 고른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보물처럼 책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첫 질문은 단순했다.
‘어떻게 바흐를 연주할 것인가.’
그러다 어느 순간 질문의 대상이 바흐에서 음악으로 옮겨 갔다.
‘어떻게 음악을 연주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에 대한 고민은 ‘무엇을 연주할까’로,
거기서 또 다시 ‘나는 왜 음악을 하는가’로 바뀌었다.
-본서 중에서
베토벤이 평생 천착한 장르는 변주곡이다.
변주곡은 단순한 주제 선율을 다양하게 변형하며 반복하는 음악이다.
베토벤에게 변주곡은 음악으로 인생을 사유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본서 중에서
청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스물입곱 살 무렵부터,
그(베토벤)는 철학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본서 중에서
‘나는 왜 이 음악을 하고 있는가?’
베토벤은 두 발을 땅바닥에 꼭 붙이고서는 음악을 통해
존재와 인식과 가치에 대해 질문하면서 신실하고 끈질기게 음악을 했던 구도자였다.
음악에 대한 베토벤의 이러한 태도는 저자의 것과 다르지 않다.
그녀 역시 음악으로 인생을 느끼고, 사유하고, 공유하며 표현하는 음악가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How의 모차르트보다 Why의 베토벤의 음악을 선호하는 까닭에
책은 저항감 없이 시종일관 기꺼이 받아들여졌다.
태생적으로 Why를 선호하는 종류다 보니, ‘어떻게 묵상할 것인가?’는 관심 밖이다.
대신에 ‘왜 묵상을 하는가?’는 쌀통의 쌀처럼 떨어뜨릴 수가 없다.
베토벤이 평생 깊이 살펴 작곡했던 변주곡처럼
나 역시 성경 묵상이라는 주제 선율을 매일 변주하는 중이다.
‘어떻게’가 아니라 ‘왜’라고 반복 질문하면서.
#Aug. 28. 2021.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