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 생도
제사장 생도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게 하고 아름답게 할지니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모든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을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출애굽기 28:2-3)
오래 전 같은 본문을 묵상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아론이었다.
아론은 깨달았다.
무릇 제사장의 옷이란 스스로 만들어 입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지어서 입혀주어야 한다.
그 시절 나는 아론처럼 난생 처음 선교사로 임명된 뒤
선교지 케냐로 파송되었다.
현지인들에게 선교사로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길 간절히 고대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바람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종류였다.
도착하자마자 케냐에 뿌리박고 살기 위한
기본 여건인 집과 비자를 동시에 강도(!)를 맞았다.
허를 찔린 채 철퍼덕 쓰러진 마음에 일어난 것은 강한 반감이었다.
그것이 선교 센터라도 지어서
스스로 선교사의 옷을 해 입고 떵떵거리며
선교사 노릇을 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욕망의 권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지혜로운 자들이 제사장의 옷을 만들어 줄 때까지
기다리라는 교지가 왕으로부터 전달되었다.
보냄을 받은 신하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졌다.
명령을 따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었다.
9년 뒤, 다시 만난 본문 앞에서
나는 관성의 법칙을 따라 제사장의 옷을 집어 들었다.
옆 동네에 살고 있던 바울이
어느 틈에 다가와 내게 말을 건넸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4)
방탕, 술 취함, 음란, 호색, 다툼,
시기와 같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 곧 그리스도로로 옷 입고
의롭게 행동하라는 권면이었다.
제사장의 옷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옷을 만져보았다.
같은 재질의 옷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리스도의 옷과 제사장의 옷은
‘만인 제사장 신학’이라는 동일한 태그를 달고 있었다.
‘성경 부티크’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클래식한 패션.
뜬금없이 영화의 한 장면이
갑자기 기억의 성층권을 뚫고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교관 폴리(루이스 고셋 주니어)가
장교가 된 잭 메이어(리처드 기어)에게 깍듯하게 경례하는
영화 <사관과 신사>의 후반부 장면이었다.
영화 내내 장교 훈련 생도였던 잭은
교관 폴리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마침내 장교가 되었을 때, 잭은 폴리의 상급자가 되었다.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의복을 가져다가
아론에게 속옷과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을 입히고
흉패를 달고 에봇에 정교하게 짠 띠를 띠게 하고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거룩한 패를 더하고
관유를 가져다가 그의 머리에 부어 바르고
(출애굽기 29:4-7)
며칠 뒤 아침, 돋보기라도 댄 듯
유독 크게 확대되어 보이는 문자가 있었다.
‘너는’이었다.
문맥상 ‘너는’은 모세를 지칭한다.
그러나 그것은 묵상 안에서
실존적인 독자인 ‘나’를 부르는 호칭이기 되었다.
모세를 따라 모세와 함께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임명하는 의식을 치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영화 <사관과 신사>의 한 장면과 출애굽기가 엮이기 시작했다.
‘너’이기도 한 나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제사장 훈련생도를 훈련시킨 뒤
그들에게 제사장 옷을 입혀 제사장으로 임명한 후에
그들로 회막에서 제사장으로서 살아가도록 하는
일종의 교관이다.
이 때 제사장 훈련생도들은
에셀나무 지체들이 되시겠다.
그들이 영광스런 제사장이 되었을 때,
나는 그들을 자랑스러워하며 스스로 떠나가야 할 테다.
이제도 나는 주께서 지혜로운 영으로
내게 채운 말씀으로 그들을 위한 제사장 옷을 짓는 중이다.
그들을 회막문 앞에서 씻기고,
그들이 하나님의 제사장임을 거듭 가르치면서
그들로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배하는 일을 훈련시키는 중이다.
그것이 교관인 나의 일이다.
만사에 기한이 있으니,
언젠가 에셀나무 모임에도 마침이 있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멋진 제사장 옷을 입고 임관하는 그들에게
나는 깍듯하게 경례할 것이다.
각자의 회막에서 제사장으로 섬길 그들을 축복하면서.
그 때까지 제사장 생도들과 함께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Jul. 13. 2021. 사진&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