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트라바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 <콘트라바스>를 읽고.
<그 여자, 억척 어멈>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노드라마다.
모노드라마라 함은 배우 홀로 무대 위에서
북 치고 장구 치면서 넋두리 하는 형식의 연극을 말한다.
배우에게 무대와 객석을 모두 장악하면서
단독으로 이야기를 주도해 나가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런데 모도드라마의 만만치 않음은
배우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오직 화자 한 사람에게만 모든 신경을 집중하면서
경청하는 것 또한 녹록한 일이 아닌 까닭이다.
1997년 그 저녁,
<그 여자, 억척 어멈>이 공연되던 소극장에 내가 있었다.
배우가 무려 박정자님인데다
공연료가 결코 싸지 않았다는 현실이 아니었다면
그런 집중과 경청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기억도 없으리라.
그 여자, 억척 어멈이 불렀던
‘낭만에 대하여’는 아직도 눈에 선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이야기
<콘트라바스>는 모노드라마다.
콘트라바스 연주자 홀로 자기 이야기를
독자에게 두런두런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오랜 만에 음악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이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으니 퍽 재미가 있었다.
덩치만 크고 본때는 없는 악기가 콘트라바스다.
그녀만큼 주목받지 못하고 존재감이 없는 악기도 없다.
그렇다고 없어도 되는 종류는 결코 아니다.
낮고 깊게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대지와도 같아서
모든 악기 소리는 콘트라바스라는 기저선 위에서만
비로소 아름다운 꽃을 그려낼 수 있다.
콘트라바스 연주자는 물론 콘트라바스와 한 패다.
오케스트라 연주단에서
그의 위치와 역할은 콘트라바스와 꼭 같다.
존재적으로는 필수이나, 존재감에서는 무감각이다.
독주 악기로는 전혀 쓸모가 없는 그것은
그저 다른 악기들을 받쳐주면서
빛나게 해주는 그림자일 뿐이다.
너는 이같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지니라
(출애굽기 29:9)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막을 창조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동산(세상)으로 인도하여
그 곳에서 사역(이름짓기)을 하게 하셨듯이,
모세는 아론을 성막으로 인도하여
그 곳에서 사역(제사) 하게 한다.
그 모든 과정 중에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씻기고, 옷을 지어 입히고,
제사장 위임식 까지 치러준다.
하지만 정작 모세에게는
특별한 옷이나, 특별한 사역지가 없다.
보석달린 거룩한 옷을 입고서
확실하고도 거룩한 사역을 도맡아 하면서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오직 아론이다.
그에 비하면 모세는 아론의 그림자일 뿐이다.
콘트라바스 연주자의 넋두리를 듣고 있자하니
문득 모세가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떠올랐다.
오케스트라의 콘트라바스 연주자나
이스라엘의 모세나
현실 속의 나나 모두 비슷한 지점에 서 있다.
자기 분수를 지나치게 잘 알고 있고,
간절히 원한 것이 아님에도
특유의 성실함으로 맡은 바 일은 잘 하고 있고,
가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욕망이
없지는 않으나 이대로도 만족할 줄 아는 주변인.
그렇다고 나름의 식견이 없는 것은 아니고,
아니 너무나 분명한 식견과 취향을 가진 까닭에
비록 주변인이긴 해도 자존감이 높고 삶도 즐길 줄 아는!
어쩌다 보니 누군가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는 일이 사역들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물론 <콘트라바스> 화자처럼
내 이야기를 오래도록 하기도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의 것은 ‘말하기’ 보다는 ‘들려주기’ 쪽이라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는 말하는 나보다 듣는 청자가 더 중요하다.
청자가 달라지면 이야기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 점이 그것을 가리켜 ‘취미나 장기’가 아니라
‘일(사역)’이라고 명명하는 이유다.
나이를 먹을수록,
음악의 본질을 더 깊이 파고 들수록
음악이 하나의 거대한 비밀이나 신비처럼 느껴지고,
음악을 알게 될수록
음악에 대해 무언가 보편적인 것을 말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요.
-본서 중에서
#July. 3. 2021.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