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일어나
일찍이 일어나
‘이쁘니 도치(하영양)’의 상태 메시지는 여전하다.
90% blonde.
고등학교 1학년 때 이후로 7년 간 변함이 없는 상태다.
그녀 안에 존재하는 8명의 하영양들 중
‘어리버리(blonde) 하영양’이
7년 동안 권좌를 빼앗기지 않고
그녀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자기 성찰에 대한 태만의 증거일지,
아니면 무지한 자신에 대한 겸손의 증거일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하영양처럼 구체적으로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내 안에도 여러 명의 내가 있다.
그들은 대개 두 부류 중 하나에 속한다.
하나님 나라에 사는 자들과 바로의 나라에 사는 애들이다.
하나님 나라에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백성이다.
반면, 바로의 나라에게 사는 애들은
스스로 바로가 되어 통치하려는 이들이다.
출애굽기의 이야기에 빗대어 보면, '
나의 인생은 여호와께서 모세(말씀)를 보내어
바로에게 붙들려 종살이를 하고 있는
수많은 나를 구출해내는 이야기다.
그렇게 내 안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는 자들과
직접 나를 통치하고자 하는 바로들로 언제나 시끄럽다.
이 와중에 애석한 일은
나의 출애굽이 출애굽기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열 재앙으로 단 번에 성사되었던 출애굽기의 것과는 달리,
나의 출애굽은 평생을 두고 조금씩 진행되는 중이다.
빈번한 게릴라전과 끊임없는 국지전으로
바로의 세력이 처음보다 많이 약해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건재한 그다.
스스로 신이 되어 행사하는 통치의 쾌락을
끝까지 고집할 작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물러설 기미가 없기는 만군의 여호와도 마찬가지시다.
하긴 포기를 모르는 분이시니.
지금까지도 나는
내 전부 까지는 그분께 바치고 싶지 않다.
열에 아홉을 내어 드릴지언정
하나 정도는 나의 것으로 삼아 스스로 통치하고 싶다.
마음대로 판단하고, 재판하고,
비난하고, 정죄하여 벌을 내리고 싶다.
그래서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못 들은 척, 딴 청을 피운다.
쓸데없는 뉴스를 악착같이 챙겨 보기도 하고,
유투브 추천 동영상들을 맥락도 없이 클릭질 하는가 하면,
갱년기를 핑계로 하루 종일 누워서 시간을 함부로 탕진한다.
독서할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시는
그분의 영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책을 멀리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태국, 중국, 일본 드라마들을 사냥감으로 뜯어먹곤 한다.
물론, 드라마를 포식하는 일은 머지않아 질려버리기 일쑤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9: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내가 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는 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기 위해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나다.
물론, 좀 더 깨어서 좀 더 즐기라는
바로의 방해로 실패하기도 하지만.
성경적 관점에서 하루의 시작은 저녁이다.
저녁으로부터 시작하여 밤이 다하기까지
주무시지 않고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그분의 백성들은 밤 동안 잠을 통해 안식한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그들은 밤새 일하신 왕으로부터 하루를 선물을 받는다.
또한 왕은 낮 동안 자기 백성을 지켜줄 말씀을 주신다.
그것은 일종의 의복으로써
화려한 비단 옷이기 보다는 단단한 갑옷에 가깝다.
낮 동안 우악스런 각종 바로와
맞서게 하기 위해 하사하시는 것이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로 나를 섬기게 하라.”
바로의 장기는 듣지 않기,
생각하지 않기, 의식하지 않기다.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온갖 편견과 선입견으로
재빨리 판단하게 한 뒤 쉽게 살라고 한다.
고통스러운 삶의 국면을 의식하는 대신에
무의식에 구겨 넣고 방치하라고 한다.
문제란 직면하는 게 아니라,
덮어놓은 뒤 잊는 게 최선이라고 한다.
괜히 사서 고생하듯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말고,
남들처럼 재빨리 잊어버리고 편하게 살라고 한다.
고통스럽게 성장하려 하지 말고,
편안하게 정체되라고 위로하듯 꾀인다.
애써 장사하지 말고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고 편안해 지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그분은 바로와는 정반대로 말씀하신다.
듣고, 생각하고, 의식하라 하신다.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손쉬운 범주화를 과감히 유기하라 하신다.
고통스러운 삶의 국면을 용감하게 대면하고,
그것을 철저히 의식화하여 이야기로 만들라고 하신다.
작은 문제들을 직면하여 해결할 힘을 얻은 뒤,
좀 더 큰 문제들을 맞이하라 하신다.
끝없는 생각과 의식으로
고통 중에도 배우기를 멈추지 말라 하신다.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라고 격려하신다.
그리하여 매일 아침 습관적으로 일찍이 일어나는 나는
말씀의 조명으로 나의 전 존재와 전 실존, 의식과 무의식,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조리 비춘다.
그분의 이야기 속에 나의 이야기를 엮어서 담아낸다.
그분의 언어로 나의 이야기를 번역하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바로 앞에 선다.
나를 보내지 않으려는 완악한 바로에게 외친다.
“나를 보내라. 나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
바로를 찾아가는 일은 번번이 괴롭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다.
매일 아침 일찍이 깨우시는
성실하신 그분으로 인하여.
키리에 엘레이손!
#Apr. 27. 2021.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