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로니아 찬가
조지 오웰의 소설,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고.
90년대 초반 까지만 해도
엄연히 실존했던 것이 있다.
대학 시절 문학회 동아리에서 접했던
문학계의 양대 산맥이다.
문학계의 그리심산과 에발산에는
각각 순수 문학과 참여 문학이라는 이름표가
보란 듯이 붙어있었다.
그 후로 시절을 쫓아 순수와 참여라는 굴곡은
깎이고 흩어져 평탄케 되었고,
저마다의 문학들이 평활한 대지에
숱한 길들을 내며 횡행하는 중이다.
정치적 목적-<정치적>이란 용어는
이 경우 가능한 한 넓은 의미의 것이다.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
다시 말하지만, 어떤 책도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인 태도이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중에서( 본서, 옮긴이의 말)
최근에 전 세대가 남긴 유물 하나를 주워들었다.
대놓고 ‘참여 문학’을 표방하는 소설이었다.
별 기대가 없었음에도
애써 책을 열어 읽었던 것은
‘조지 오웰’이라는 명성이
여전히 죽지도 않고 살아있는 지적 허영심을
흔들어 깨웠던 까닭일 테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기대의 낙차 효과 때문인지,
아니면 중년이라는 나이 탓인지는 몰라도
독서에 꽤 재미를 보았던 것이다.
어쩐 일인지 개인적으로
문학과 예술의 소재로써의 전쟁은 낯선 법이 없다.
나고 자란 곳이 전방 군부대
밀집 지역이어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어려서부터 친숙하게 경험했던 것들 중
한 부류는 대개 이런 것들이었다.
탱크, 장갑차, 군용 트럭,
길게 늘어선 군인들의 행군 행렬, 기관총과 대포 소리,
검문소와 헌병들의 찰찰 거리던 군화 발소리 등등.
심지어 지나가는 군 트럭에서
미군이 던져준 초콜릿을 주워 맛본 적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군가 몇 개쯤은 쉽게 따라 불렀었고,
군대 계급장이나 위계 역시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개인적 경험이 스페인 내전을 그려내고 있는
소설 <카탈로니아 찬가>를 퍽 친숙하게 느껴지게 했을 테다.
게다가 소설은 꽤나 흥미진진하고 재밌었는데,
이는 선교사로서의 경험 때문일지도 모른다.
선교지 최전방에 파병되었던 개인적 경험이
스페인 내전 최전방에 파병된 소설 속 화자의 것과
겹치면서 공감대를 형성했을 테다.
신앙적 소명이든, 혁명적 신념이든
어쨌든 나와 화자는 자발적, 의지적, 실천적으로
전쟁의 최전방을 선택하여 파병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처음에는
전선의 상황 때문에 겁에 질렸다.
도대체 이런 군대를 가지고
어떻게 전쟁에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당시에는 모두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사실을 정확히 본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대책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여건상 의용군은 그 수준보다
별로 나아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대적으로 기계화된 부대는
어느 날 갑자기 땅에서 솟아나지 않는다.
인민 전선 정부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훈련된 부대를 양성할 때까지 기다렸다면,
아예 프랑코에 대한 저항을 시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훈련과 무기 부족으로 인한 결함이
마치 평등주의적 체계의 결과인 것처럼
호도되기도 했다.
-본서 중에서
작중 화자처럼 의용군이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선교사 훈련을 일절 받아본 적 없이
한 손에는 학위증, 다른 한 손에는 신앙적 소명을 들고
최전방으로 파병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최전방 전선에 대한 느낌은
화자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군대를 가지고
어떻게 전쟁에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대책도 없었고, 수준이 나아지거나
무기가 향상될 기미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웠다.
하나님의 나라가 질 것만 같았다.
이는 불신이었다.
결국 내가 그토록 쩔쩔맸던 것은
불신앙 때문이었다.
선교사의 불신앙이라니!
난감한 노릇이었다.
뜨겁게 회개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최전방이었다.
일면,
준비와 훈련과 갖춰짐만을 우선시 한다면
시작하지도 못할 것이 선교다.
어쨌든 일단 파송된 자들은 부족한 훈련과 지원 와중에
다치고 부상을 당해도 최선을 다해 자기 자리를 지켰다.
비록 오합지졸이긴 해도
의용군에게는 최대 강점이 있었다.
충성심이었다.
충성심 하나로 불리한 여건과 참혹한 상황을
견디고 버티면서 최전방을 지키는 자들이 선교사들이다.
나는 파시즘에 맞서기 싸우기 위해 의용군에 입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었다.
마치 수동적인 물체처럼 그냥 존재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배급받은 식량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한 일이라고는
기껏 추위와 수면 부족을 견딘 것뿐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대부분의 전쟁에서
대부분의 병사들이 겪어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본서 중에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느낄 법한 초조함이 있다.
복음을 들고 자원하여 파병되었지만,
제대로 복음을 전해본 적이 없는 것만 같아서
초조하고 불안한 것이다.
수동적인 물체처럼 선교지에
그냥 존재만 하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견디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이 선교다.
선교의 첫 임무는 파병된 곳을 지키면서
보내신 분을 기억하면서 예배하는 것이다.
교회들로부터 보내온 귀한 배급 식량에 고마워하면서,
선교지의 이방인으로서 받을 수밖에 없는
학대와 추위(왜 그렇게 추운지)와
결핍감(육체적, 정신적, 정서적)을 견디는 것 자체가
굉장한 수고다.
그렇게 오래 참고 견디는 자에게
전투의 기회도 주어지는 것이다.
물론, 전투 전에 각종 사고와 이유들로
후방으로 인도되기도 하겠지만.
당시에는 그토록 무익하고 지루할 정도로
평온하게 느껴지던 시기가 지금은 매우 소중하다.
그 시기는 내 인생의 다른 시기들과는 워낙 달라서,
벌써부터 마술 같은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 속성은 보통 오래된 기억에만
생기는 것인데 말이다.
당시에는 지긋지긋했지만, 이제 그 기억은
내 마음이 뜯어먹기 좋아하는 좋은 풀밭이 되었다.
-본서 중에서
아직은, 아직은 아니다.
나의 선교지는 마음이 뜯어먹기 좋아하는
좋은 풀밭이 아직은 아니다.
그 곳은 지금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묶여있다.
나의 의식이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어 놓은 채,
무의식에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무려 불법체류자였고,
무시와 학대의 대상이었고,
인정 중독과 공주병 진단을 받고 괴로워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곳에서 나는
내 안의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목격하면서 두려워 떨었다.
그것들은 수많은 죽음들을
불법적으로 전시하면서 겁박하길 쉬지 않았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의 법칙을 따라
급작스레 전역을 한 뒤, 고향 땅으로 귀국을 하게 되었다.
때가 되면, 화자처럼 나의 선교지,
나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개발 제한을 푼 뒤,
무의식에서 끌어내어
그것으로 푸른 초장이 되게 할 날도 오겠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자원들이 묻혀 있는 나의 선교지가
내 마음이 뜯어먹기를 좋아하는 좋은 풀밭이 되기를!
그런 축복이 내게 임하기를!
말할 필요도 없이, 탱크, 야포 등에 대한
이 같은 이야기들은 날조된 것이다.
적은 인원의 통일노동자당이
엄청난 규모의 시가전을 벌였다고
억지로 꿰어맞추려다 보니 그런 날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시가전의 모든 책임이
통일노동자당에 있다고 주장해야 했다.
동시에 통일노동자당이 추종자도 없고,
《인프레코르》에 따르면, <당원도 수천 명 밖에 안 되는>
하잘것없는 정당이라고 주장해야 했다.
두 진술을 모두 믿을 만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통일노동자당이 현대식 기계화 군대의 무기를
다 갖추고 있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뿐이었다.
공산주의 매체의 보도들을 읽어가다 보면
그들이 사실에 무지한 대중을
의식적으로 겨냥하고 있으며,
편견을 심어주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본서 중에서
지금도 심심찮게 태어나는
날조 생산자의 특징들 중 하나는 뻔뻔하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탈 줄 모르기에
수치스러운 일로부터 도망치지도 못하는 그다.
그래서 그의 뻔뻔함은 성실하고도 근면하게
날조의 길을 반짝반짝 빛나는 대로로 만드는 것이다.
마치 성공가도처럼 보이는 까닭에
많은 이들이 그 길을 따른다.
그들에게 수치 있으라!
사실 모든 전쟁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점차 타락해 간다.
개인적 자유나 진실한 언론 보도는
군사적 효율성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서 중에서
진행되는 과정에서 타락해가는 것이 어디 전쟁뿐일까?
인간의 모든 일들,
심지어 선한 의도로 시작한 일의 운명도 다르지 않다.
선교도 예외일 수 없다.
선교적 효율성, 선교적 승리를 위한다는 명분은
현지인들과 그들 문화에 대한
존중과 보호를 손쉽게 훼손시킨다.
게다가 왜곡된 선교 보고는
그러한 선교적 참상을 것을
승리를 위한 것(표면적 성공)으로 날조시킨다.
그 과정에서 선교의 본래적 의미와 의도 역시
훼손당하고 마는데, 선교적 효율성과 승리를 위해서
선교의 선한 의도는 단칼에 희생되고 마는 것이다.
그 와중에 뭐 하나 제대로 한 일이 없는 나다.
오래 참고 견디시는 선교의 주인에게
송구하여 고개를 들지 못할 뿐.
책 표지에 인쇄된 조지 오웰의 사진을
보자마자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김수영 시인.
한국 참여 문학계의 대표 시인이라는 점에서
조지 오웰의 이미지가 김수영 시인의 것과
비슷하다는 게 흥미롭게 느껴졌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고자 하는 욕망,
그것을 에너지 삼아 읽고 쓰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참여 문학인이다.
그렇게 멋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Mar. 2. 2021.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