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금욕의 사람에게 파티의 사람은 외계인이다.
세례자 요한에게 예수님이 그랬다.
먹고 마시는 예수님은
금식해왔던 요한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통해
예수께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던 이유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마태복음 11:3/새번역)
요한이 보내온 것은 단답형 문제였다.
흑과 백 중 하나,
예스 혹은 노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짧을 수 없었다.
세례자 요한을 퍽 존중하셨던 까닭일 테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마태복음 11:4-6/새번역)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가자,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세 번을 물으셨고,
세 번 다 스스로 답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마태복음 11:7,8,9/새번역)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
그렇다면 잘못 간 거지.
갈대 보려고 했으면 응당 물가로 갔어야 하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했다면
왕궁에 갔어야지.
혹시 예언자? 그래, 그것이 정답이야!
사실,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외치던 예언자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도 역시 평판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이 예수께서 자신이 기다리는
바로 그 그리스도인지 의심스러워했던 이유다.
당시 예수님에 대한 평판은 다음과 같았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태복음 11:19)
세간의 평판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귀신이 들린 사람(마태복음 11:18)이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면서
미친듯이 금욕했던 까닭이었다.
반면, 예수님은 파티 피플(Party People)이었다.
파티가 열리는 곳이면 그 곳이 세리의 집이든
죄인의 집이든 가리지 않고 찾아가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긴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두 사람에 대한
세간의 평판은 옳지 않았다.
올바른 사실은 이랬다.
금식하는 요한은 하나님의 예언자였고,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쓸 데 없는 평판일랑은 접어두고,
오직 행한 일로만 평가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예수께서 예스 혹은 노우라는 대답 대신에
본인이 하신 일들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하신 까닭이다.
‘요한, 세간의 평판 따위를 근거로
나를 판단하는 일일랑은 썩 집어치우게.
대신에 내가 직접 행한 일들로
내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가늠해보게.’
뭐든지 그것이 삼 세 번이라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고 기울인 결과,
무리를 향한 예수님의 삼 세 번 질문은
내게 하신 것이 되어버렸다.
“예야,
너는 무엇을 보러 미국에 나갔더냐?
무엇을 보기 위해 케냐에 나갔더냐?
대체 무엇을 보려고 우크라이나에 나갔더냐?
풍요롭게 잘 먹고 잘 사는 것?
화려하게 차려 입고 각광을 받는 것?
아니, 아니다.
그런 걸 원했다면,
애초에 한국을 떠나지 말았어야지.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혹시 예언자? 그래, 맞다!
거친 사막과 황폐한 광야,
그리고 삭막한 땅에 네가 나간 이유는
예언자, 예언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지.”
이제, 내가 서 있는 광야는 한국이다.
오늘의 한국은 20여 년 전,
이곳을 떠나기 전의 한국이 아니다.
새로운 곳, 낯설고 생경한 이방 땅이 되어버렸다.
그동안 한국도 나도 변해버린 탓이다.
지금까지의 광야의 여정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이곳에서도 내가 볼 것은 여전하다.
예언자, 곧 예언의 말씀이다.
다시 시작되는 광야에서의 모험을 앞두고
나는 손톱을 자른다.
가만 두면 손톱처럼 자라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일랑은
때 맞춰 싹뚝 잘라가면서 관리를 해주어야 한다.
간절히 소망하기는
무사히 모험을 마칠 수 있도록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기를,
세속적 자본주의의 허를 찌르는
신선하고도 거룩한 상상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선택하기를,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매일을 기어이 누리기를!
키리에 엘레이손!
#Feb. 12. 2021.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