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공간이 만든 공간

창고지기들 2020. 12. 26. 10:29

 

 

 


유현준의 책, <공간이 만든 공간>을 읽고.

 


책은 새로운 생각들의 출현 과정을 

건축가의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를 위해 작가가 선택한 그릇은 

요사이 각광을 받고 있는 거시적 역사 기술 방법이다. 

건축가인 작가는 

BC 9500년 이전부터 2000년대까지의 도시, 사상가, 

건축물, 발명품, 책, 상업, 예술품들 중에서 

작가 본인에게 유의미한 것들을 선별하여 

새로운 생각들의 출현 이유를 설명한다. 

 

작가에 의하면 새로운 생각들은

‘제약’에서 시작된 ‘위기’와 

‘다름’에서 시작된 ‘융합’을 통해 창조된다. 

인류는 기후적 제약이 가져오는 생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농업이라는 인공적 생태계를 창조했고, 

이후 교통의 발달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와 문명들이 

상호 충돌하고 융합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꾸준히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제약에 의한 위기, 

다름에 의한 융합이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꾸준한 원동력이 되리라는 것이 작가의 의견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맡겨질 것이다.


두툼한 분량에 비해 책의 내용은 쉽게 읽히는 편이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가 선택한 주된 기술 방법, 

그러니까 동양과 서양을 이분하여 

대조하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과 서양이 각각 어떻게 서로 다른 기후라는 제약을 극복했는지, 

그것이 어떻게 문화와 사회를 서로 다르게 빚어왔는지, 

나아가 그들이 교류를 통해 다름을 

어떻게 융합하여 발전시켜 왔는지를 

작가는 선명한 대조법을 통해 시종일관 설명하고 있다. 

이분법과 대조법만큼 

명쾌하고도 자극적(?!)인 기술 방법도 없으니, 

책이 퍽 쉽게 느껴졌던 것은 당연하다.

 


개인적으로 책을 통해 얻은 소소한 유익들은 다음과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각의 합이 180도인 삼각형을 

리의 머릿속에서 상상하여 인식한다. 

그리고 원이란 한 점에서 같은 거리의 점들을 

연결한 선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한다. 

이러한 수학적 개념은 다분히 

현실 세상에서는 실존하지 않는 완전성이다. 

이러한 수학의 완전성은 

이데아의 개념적 완전성과 일맥상통한다. 

플라톤은 개념상 온전한 세상인 이데아를 상상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이성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본서 중에서


대강 문과인 우리 가족들은 수학도 곧잘 한다. 

아니, 수학 점수가 문학 점수보다 평균적으로 높은 편이다. 

옛날(!)에는 신학과 철학과 수학과 과학과 문학과 

예술이 모두 하나의 덩어리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문성이라는 미명(?) 

혹은 게으름(!) 아래 갈기갈기 찢겨져 버리긴 했지만, 

여전히 그것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또 그래야만 발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수학을 잘하는 문과인들에게는 소망이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인식하여 연구하고 공부하면서 

그분의 뜻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성도의 일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수학적 사고는 매우 필수고,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만을 인정하여 집중하는 것은 

과학적인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수학(눈으로 볼 수 없는 완전한 ‘원’을 믿는!)이 

과학의 언어인 까닭이다. 

오래 전에 합리적 근거를 들먹이면서 

기독교 변증을 활발히 요구하던 때가 있었다. 

만일 수학적 사고가 망가지고 결여된 자들이 공격해왔다면, 

불가능했을 소통이었을 것이다. 

 


양식 혹은 규칙을 만들고 규정하기 좋아하는 것이 

양 문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동양의 나무 기둥과 보를 가지는 

구조 양식은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다만 건물은 놓인 대지의 조건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반응하면서 

건물의 배치를 변화시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유기적이고 상대적인 공간을 연출해 왔다. 

-본서 중에서


서양과 동양 문화가 각각 절대성과 수학, 

관계와 비움을 바탕으로 이룩되었다는 설명은 

여러모로 실용적이다. 

프랜차이즈 식당과 자생적 로컬 식당이 

각각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듯이, 

각각의 문화 역시 사회 경제 문화적 제약으로 인하여 

위기를 겪을 때마다 서로의 장단점을 적절하게 공유하고 

융합한다면 어떻게든 살아남게 되고, 

그럴수록 사회는 조금씩 변모하게 될 것은 분명하다. 

물론, 교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특별히 서양으로부터 들여온 종교이기에, 

그것이 배타적 절대성과 

수학적인 교리 신학 위주였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제 동양적인 관계와 비움, 

곧 예배와 안식을 강조하고 실천하는 것은 

오늘날을 살아내야 하는 교회의 현명한 변화일 것이다.

 


한옥에서는 툇마루가 실내인지, 외부인지 불명확하다. 

툇마루는 지붕과 바닥은 있지만 벽이 없는 공간이다. 

건축의 내부 공간을 규정하는 지붕, 벽, 바닥이라는 

세 가지 요소 중에서 두 가지만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이러한 공간을 찾는다면 1층 카페 바깥에 

의자를 놓는 데크(deck) 공간이 될 것이다. 

정확한 용어는 ‘테라스’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통상적으로 ‘데크’라고 부른다. 

우리가 카페의 데크에 앉아 있을 때 기분이 좋은 이유는 

외부에 있으면서도 내부에 있는 것 같은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본서 중에서


지금까지 소비를 멈출 수 없었던 이유가 

벽 중심의 건축 공간에서 살았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공간을 채우지 않으면 안 되는 건물에서 살았던 까닭에 

테트리스 게임을 하듯 집안을 빼곡하게 채우려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미니멀리스트로 변신하는데 

번번이 실패했던 것을 두고 

오로지 개인적인 능력 부족한 탓으로 돌려왔었다. 

그런데 나를 둘러싸고 있던 

건축 공간의 탓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건축물의 특성 상, 풍경을 안으로 들이는 일이 불가능하기에 

인공적 풍경을 위해 내부를 아름다운 물건으로 채우는 것이 

서양 인테리어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서양의 벽 중심의 건물들은 

맥시멀리스트를 낳아 기르는 데는 능숙해도, 

미니멀리스트는 쉬이 유산시키는 것이다. 


갈수록 건물 밖 풍경에 

자주 시선을 멈추고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풍경을 집안으로 들이는 일이 

얼마나 모험적인(!) 일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어릴 적 툇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던 기억은 

지금까지도 기분 좋은 그림으로 남아있다. 

그런 곳에서 살면, 

어쩌면 저절로 미니멀리스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흐음.

 


시간의 아이로 태어났으나 공간의 아이로 자라난 나다. 

시간을 공간으로 근면히 바꾸어왔음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공간에 대한 관심은 당위가 되었고, 

갖고 싶은 공간은 언제나 가지기 어려운 범위에 놓여있었기에 

선망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렇게 공간에 대한 갈증은 당뇨병처럼 늘 성가시게 굴어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다행한 일은 있었다. 

공간에 대한 욕망이 구체적으로 대상화되었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대륙들과 수많은 집들로 

이사를 다녔던 고단한 이력 덕분일 테다. 

공간에 대한 욕망을 다루면서 

그것에 대한 나름의 의견 내지 신학을 

조금씩이라도 쌓기 시작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도움을 준 

책을 만난 것 또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이 생각을 불러 생각을 만들고
공간이 공간을 불러 공간을 만들고
……

 

 


#Dec. 26. 2020.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