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일상-부활을 살다

창고지기들 2020. 12. 12. 10:00

 

 

 

 


유진 피터슨의 책, <일상-부활을 살다>를 읽고.

 


그리스도의 탄생이나 십자가 보다 

부활이 어려운 이유는 아마도 ‘시간 경험’ 때문일 것이다. 

탄생이나 십자가는 익숙한 시간성을 입고 있으나, 

부활은 낯선 순간성을 입고 있는 것이다.


시간성은 과거에서 현재를 통해 

미래로 뻗어나가는 일직선적인 시간 경험을 의미한다. 

시간성 안에서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 과거나 

욕망하는 미래를 현재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오늘은 어제의 결과 혹은 반복일 뿐이며, 

내일을 위한 담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성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현재를 향유하지 못한 채, 

벌을 받듯 반복되는 매일을 

지루해하는 동시에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다. 

반면, 순간성은 순간 자체에 

집중하며 향유하는 시간 경험이다. 

순간성 안에 살아가는 자들은 ‘지금 여기’, 

그 자체에 집중하기 때문에 지루해할 틈이 없다. 

마치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모든 것이 매번 새롭고, 

매 순간 재밌고 싱그러운 것이다. 


부활은 역사라는 직선적 시간성을 깨뜨리고 

침범한 순간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설명과 이해가 가능한 세상에 드리워진 

물러서는 법이 없는 신비이자, 

별도의 괄호로 묶일법한 

특별한 체험이 아닌 평범한 일상이자,

특별한 자들의 전유물일 수 없는 

모든 이들을 위한 생활필수품이다. 

요약하자면, 

부활은 일상생활을 하는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일상의 신비다. 


먹고, 입고, 씻고, 일하고, 교제하는 

모든 일상에서 매우 필수적인, 

그래서 끝내 깨달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발견하는 것, 

현재에 집중하여 

지금 여기(그곳이 어디든)에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누리는 것, 

모든 것이 깨어진 고난의 자리에서 

고통의 파편으로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찬송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바로 부활이자, 

부활의 행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생활 필수적 부활을 

누리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훈련이 몹시 요구된다. 

안식일 지키기, 성만찬 나누기, 거룩한 세례 받기가 

그 훈련의 구체적인 방법이다. 

지속적으로 안식하고, 계속해서 가족, 동료, 지체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씻으면서 시간성 안에 순간성을, 

판에 박힌 일상 안에 신비를 들일 때, 

우리는 부활의 거대한 포문을 여신 분, 

역사 안으로 부활을 기어이 끌어들인 분, 

곧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영성의 형성과 자람)에 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일 속에는 일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곧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일을 완성하신 하나님, 쉼을 즐기시는 하나님,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일터가 우리 삶의 전부일 수는 없다. 

하지만 안식일은 일과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일을 바탕에 둔, 그 이상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런 안식일이 없다면, 일터는 

곧 하나님의 임재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곳이 된다. 

그리고 일 자체가 궁극적 목적이 되고 만다. 

그 결말이란 일터를 우상을 위해 피가 흥건한, 

쉼이 없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모든 관계를 기능적인 것, 

곧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역할의 수준으로 축소해 버릴 때 

일터는 우상을 마드는 곳으로 전락한다. 

일터를 단지 우리 자아의 무대,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곳으로 축소해 버릴 때도 

우리 일터는 우상을 만드는 곳이 된다. 

-본서 중에서


하영양의 자가 격리를 위해 피난처를 떠나 

급조된 시골집에서 보내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피난처에서 피곤하지 않은 날은 없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이에 ‘정착’이라는 일에 중독되어 

안식을 유기해 버려왔음을! 

안식일을 사수하는 것은 곧 생명을 사수하는 일이자, 

죽은 일상에 부활의 호흡을 불어넣는 것임을 

새삼 다시 마음에 새겨본다. 


생명이 있는 땅은 위험한 곳이다. 

잘못되는 일이 너무나 많다. 

여기저기 환난의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부활은 이런 죽음의 땅에서 일어난다. 

생명이 있는 땅은 분명 낙원 같은 휴양지가 아니다. 

오히려 전쟁터에 가깝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자녀들과 더불어 

자리를 잡은 곳은 바로 이런 곳이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을 앞지르는 삶을 선포하고, 

모든 삶의 유기적 연관성과 그 소중함을 증거하며, 

부활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간다. 

우리의 삶은 그 전부가 이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죽음을 정복하신 그리스도, 

그리고 생명을 풍성케 하시는 성령 앞에서 

공동체로 모여 규칙적인 예배를 드린다. 

-본서 중에서


돌고 돌아 돌아온 곳 역시, 죽음의 땅이긴 마찬가지다. 

총성과 대포 소리가 귀를 때리며 영혼을 뒤흔드는 중이다. 

타나토스가 판을 치는 전쟁터에서 

나는 부활과 함께 살기로 한다. 

모두가 어렵다, 죽겠다 아우성치는 

일상의 한복판에서 

신비, 곧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죽음을 정복하신 그리스도, 

그리고 생명을 풍성케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와 섭리를 믿으면서 

지금 여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한다.



하지만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 과정에는 

외워야할 공식이나 준수해야 할 원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임하시는 것은 

우리의 초대에 응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우리를 초대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그때그때마다 상황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 

식사의 주인은 언제나 예수님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성 형성을 

“책임지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메뉴를 결정하는 것도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취향과 입맛에 따라 

식탁의 내용을 맞출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 당당하게 앉아 

그 식사를 즐기며, 실제로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 자체에 개입하게 된다. 

-본서 중에서


우리 집 중심에는 테이블이 있다. 

테이블이 중심인 이유는 주께서 우리 가족을 

당신의 공동체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때때로 초대하되 대부분 초대받으면서 그분이 주도하시는 

식탁에 참여하는 일은 기쁘고도 흥분되는 일이다. 

오롯이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모든 것을 책임지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주시는 대로 받아 즐기기만 하면 된다. 

가끔 마음에 들지 않아

 볼멘소리를 하는 불충을 저지르긴 해도, 

아예 내치지는 아니하시니 얼마나 은혜로운 식탁인가!


물론 이런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는 목회자들이나 

전문가들이 나보다 한 수 위라는 식의 

자기비하적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로 말이다. 

그래서 예수를 따라가는 일은 

예수 전문가들을 따라가는 일로 대체된다. 

그러다 보면 머지않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는 소비자의 습성을 체득하게 된다. 

내가 필요로 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것이다. 

물론 나는 종교적인 소비자다. 

하지만 소비자라는 사실은 매한가지다. 

수동적 태도를 가진 마비된 영혼이 되는 것이다. …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율성과 전문가 의존증이 함께 엉킨 문화는 

이러한 해체를 야기하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자율성의 문화는 독자성과 

자기충족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로 받아들여지고, 

자신만의 노력으로 현재의 위치에 올라왔다는 사실도 

하나의 멋진 성취로 간주된다. 

-본서 중에서


요즈음 개인적으로 

가장 큰 실존적 문제는 지나친 자율성이다. 

고립된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라는 변명을 해본다. 

물론, 개인주의적인 성향도 한 몫을 했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를 

찾고 구하는 일이 시급하다. 

더불어 부활을 일상에 들이면서 

신비로운 오늘을 즐거워하면서

영광을 돌리는 지체들을 

기어이 허락해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며 마친다.


 

 


#Dec. 9. 2020.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