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체온
그리스도인의 체온
고난 받지 않는 생이 어디 있으랴!
그 중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기꺼이 선택한 자들에게
고난은 몇 곱절 가중되기 마련인데,
이는 세상이 그들을 특별히 미워함이다.
그렇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고난을 받고,
핍박을 곱하면서 위험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산파로서 신부 그리스도가 낳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받아냈던 바울은 그런 그들을 깨끗이 씻긴 뒤,
품에 안고 권면의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직접 안고 먹이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긴 편지를 통해 그들을 돌봤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배나무에는 배가 맺히고,
사과나무에는 사과가 맺히며, 감나무에는 감이 맺힌다.
각각의 열매는 그 나무의 나무됨을 알린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나,
꽤 새삼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흙, 곧 밭에 비유하셨다.
이는 마음의 질이나 품어낸 씨앗의 종류에 따라
사람은 저마다의 소산을 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즉, 사람이란 말씀이든, 세계관이든,
환상이든, 전통이든 할 것 없이
마음에 무엇인가를 심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정체성이라는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으며,
그래서 그 사람의 사람됨은
여지없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권면한다.
그대들의 매일이 비록 고난으로 점철된 날들일지라도
마음에 그리스도(말씀)를 심어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열매를 맺으라고.
그러면 그로서 그대들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아바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세상에 온전히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라는
명령형 동사들은 목적어를 필요로 한다.
목적어가 있어야 두 발로 온전히 설 수 있는 그들이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주었던 권면에서
그들 명령형 동사들은 하나 같이 외발로 서 있다.
바울이 목적어를 거세해 버렸기 때문이다.
대신에 바울은 그들에게 부사라는 지팡이를 쥐어 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붙들고 오롯이 서있는 중이다.
그렇게 바울이 쥐어준 부사,
곧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는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는 동사를
구체적인 행동을 위한 동사가 아니라
일반적인 상태를 강조하는 동사로 가공시켜주고 있다.
결국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기뻐하지 않을 때가 없는 기쁨의 존재,
호흡하듯 끊이지 않고 기도하는 기도의 존재,
어떤 상황(심지어 억울하게 핍박을 당하는 중에도) 속에서도
감사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감사의 존재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실존적 상황에 좌우되는
선택적 행동으로서의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아니라,
상황과 배경을 초월하는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존재로서
밥 먹듯 기쁨과 기도와 감사를 행하라는 것이다.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모두
대상을 지향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것은 내재하시는 동시에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뜨겁게 추구하는 움직임이다.
하나님을 향해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행동은 샬롬(전인격적 평안)을 가져온다.
결국,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샬롬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체온을
36.5도를 유지하는 것이 건강한 사람인 것처럼,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추구하는 샬롬의 존재가
건강한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렇게 샬롬은 그리스도인의 항온이다.
거짓말, 협박, 불의, 불공정,
그리고 그로 인한 불안감, 우울증, 허탈감.
살갗을 찔러대는 가시덤불과
발바닥을 까지게 하는 돌무더기,
그리고 호시탐탐 머리를 쪼아대는
불법하고 무례한 새들이 합심하여 덤벼대는 통에
고작 마음 하나도 지키고 가꾸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럼에도 나는 샬롬의 존재이다.
내 마음의 체온은 언제나 ‘샬롬’을 애써 고수한다.
하나님을 향해
그냥 막 기뻐하고, 그냥 막 기도하고,
그냥 막 감사하기로 하는 것이다.
그녀-(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오빠는 뭐가 좋다고 그렇게 맨날 실없이 웃어?
그-(동그랗게 눈을 뜨며 놀란 듯이) 왜 안 웃어?
웃음이 디폴트(기본값)인 사람이 비웃음을 당한다.
웃음이 디폴트니까 그냥 막 웃는 것이 당연한 그가 좋다.
실없이 웃는 인생, 당연하다는 듯 웃는 인생.
습관의 산물이 아니라 존재의 산물로서
항상 웃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인생을 사는 이가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Nov. 14. 2020.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