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라야를 위하여
나의 스라야를 위하여
병참관 스라야가 배달받은 것은
무기나 군수품이 아니었다.
예레미야가 보낸 한 묶음의 두루마리,
한 권의 책이었다.
그런데 어찌 보면 그것은
무기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시한폭탄이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동 폭발하여
강대국 바벨론을 일순간에 전복시킬
무시무시한 무기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것이었다.
유다의 왕과 함께
바벨론에 도착한 스라야는 배달받은 책을 꺼냈다.
그리고 벌써부터 포로로 끌려온
유다 백성들 앞에서 그것을 낭독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에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예레미야 51:62)
단 한 번의 독서이후,
책은 저자의 뜻대로 바벨론의 젖줄
유브라데 강에 던져졌다.
스라야는 다시 떠오르는 일이 없도록
책에 돌을 매달아 깊숙이 빠트렸다.
책이 강바닥에 닿자마자
말씀의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속을 따라 흐르던 시간이
정확한 때에 이르면 어김없이 터질 것이었다.
그리고 말씀이 이루어질 그 때까지
포로 신분인 유다는
소망의 보호를 받으면서
어떻게든 삶을 꾸려갔을 것이다.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것이 어디 사람뿐일까?
하나님의 말씀도 가슴에 묻어지는 것이고,
심지어 그것은 결국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고야마는 씨앗이다.
그래서 말씀을 품은 사람은
인내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침내 맺을 열매를 소망하면서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한 예레미야의 책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보여준다.
현실은 비참한 바벨론의 포로일지언정
소망 안에서 말씀이 이루어지길
적극적으로 기다리면서
땅에 발을 붙이고 꿋꿋이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셨던 것이다.
절망을 겨우 견디며
공중에 부유(浮游)하듯 떠다니는 것은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이나 하는 일인 것이다.
다시 두루마리를 건네받은 나다.
그것을 앞에 두고 나는 고심한다.
지금까지 별로 생각해본 적 없는 스라야와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들에 대해서
골똘해지는 중이다.
결국, 나의 일은 예레미야의 일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말씀의 씨앗을 건네는 일이자,
시한폭탄을 제조하는 일이다.
구체적인 수신인과 배달 장소를
염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첫 독자인 스라야를 비롯하여
다른 독자들을 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읽히지 않는 글을 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예레미야는 비록 읽히지 않아도
그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단 하나의 독자에게 단 한 번의 읽힘 후,
유브라데 강 속에 던져진 자신의 책을 보라고 한다.
돌보다 무거운 하나님의 영광에 매여 있는 한
그것은 절대 유실될 수는 없으며,
심지어 독자들에게 영원히 잊힌대도
하나님은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럼에도 심오한 예레미야와 달리
가볍기 이를 데 없는 나는 여전히 헛꿈을 꾼다.
나의 글이 체념에서 인내로 선회하는데
나의 스라야, 곧 어느 한 독자에게라도 도움을 주기를,
그것이 스라야의 가슴속 강에 오래도록 남아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되어주기를!
그래서 오늘도 나는 글을 짓는다.
마치 싼타클로스처럼
울지 않는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할 글을 만든다.
나의 스라야를 위해
그분의 말씀으로 선물을 짓는다.
키리에 엘레이손!
#Nov. 6. 2020.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