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의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고.
이쯤 되면,
작가 최은영의 팬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두 번째이자 최근작을 읽자마자
벌써부터 그녀의 다음 작품을 읽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이야기는
어느 것 하나 재밌지 않은 것이 없었고,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작가 최은영의 이야기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화자들의 태도와 목소리다.
그들은 매우 역설적인데,
그 역설은 약자이면서 동시에 강자라는
그들의 그러함에서 나온다.
사회적으로 주로 비주류에 속한 관계로
그들은 약자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주도하는 화자라는 위치는
그들을 강자로 만든다.
일반적으로 강자들은 무례하기 쉽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겸손하고 온유한 편이다.
그래서 듣기에 저항감이 없었고,
그래서 오래 듣다보니
그들 어조에 배어있는 물기로
덩달아 축축해지기도 했다.
화자들이 머금고 있던 것은
자기연민이 길러낸 눈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병약한 인간이
자기 체온을 유지하고자 흘리는 땀에 가까웠다.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꾸준히 치근대는 우울감으로 바짝 말라가는 정서에는
눈물보다 땀이 좋을 수 있다.
그렇게 화자들의 약함과 강함이 만들어내는 온도차는
한겨울 펄펄 끓는 노천탕에 들어앉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여름>의 이경과 수이,
그리고 <고백>의 미주, 진희, 주나는
나의 중·고등학교 동창생들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내게도 이경과 수이,
그리고 진희와 같은 친구들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그들과 괜찮은 관계를 맺기도 했었는데,
나는 그들과 같은 부류는 아니었다.
졸업 후,
나의 이경과 수이가 함께 산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그들 가족들의 눈물과 비난과 저주도 같이 들려왔다.
그들 가족들이 이해되는 건 자연스러웠는데,
동시에 이경과 수이 또한 너무나 이해가 되었던 것이
좀 이상했었다.
‘결국 그렇게 됐구나!’
덤덤한 나의 수긍은 내 노력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진희가 안타까웠고,
미주와 주나가 안쓰러웠다.
흑백 영화 같던 세상에서 총천연색 세상으로
서로를 꺼내주었던 그들의 관계를
나는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다.
그것은 엄연히 인격적인 관계이고,
그들 또한 사랑하도록 명령받은
나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601, 602>의 효진이네와 주영이네,
<지나가는 밤>의 윤희와 주희네,
<손길>의 혜인이네를 비롯하여
<모래로 지은 집>의 공무네나 나비네,
<이디치에서>의 랄도네와 하민이네 까지
원형의 이야기로 살아 역사하는 것은 ‘가족’이었다.
소설 속 가족은 캐릭터들이 처한
가장 냉혹하고 잔인한 현실이었다.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지옥이
가족 관계였던 것이다.
사회에 만연한 가족에 대한 판타지
(아빠, 엄마, 아들, 딸이 정원에서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에 겨워
웃고 있는 모습으로 대변되는)는
지옥 같은 가족 이야기를 비밀에 부치게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소름끼치는 비밀이
가족 간의 결속력을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족의 이야기는 금기의 대상이 되거나
영악한 효진이의 경우처럼 미화의 대상이 되기도 하다가,
운이 좋으면 친구나 동료와 같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정직하게 발설되기도 한다.
나눠진 비밀은 타자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주고,
검은 피처럼 쏟아져 나온 가족 비밀은
그것을 폭로한 이의 체증을 풀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모래로 지은 집>과
<이디치에서>를 가장 따뜻하게 읽었다.
하민이 랄도와 헤어지던 장면에서는
나 역시 하민 옆에서 붙박인 채 눈물을 짓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내 글에 악랄하게 들러붙어 있는
자기연민에 대해 골똘해지게 되었다.
그것이 교만의 산물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는 바다.
그래서 완전히 쫓아내지 못할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 가꿔진 포도원을 망치는
작은 여우다.
그러므로 포도원을 가꿀 때마다
작은 여우의 흔적이 있는지
샅샅이 살펴보아야 마땅하다.
가꾸기는 어려워도
망치기는 쉬운 것이 포도원이다.
안일하게 방관하지 않도록
지속적이고도 의식적으로
경계하고 또 경계하자.
미성년 시절, 작가는
전체주의적 단체 행동을 강요했던 학교생활 중에
개인행동을 갈망했었다고 한다.
내 경우에는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며,
폭력적인 상황을 그저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것이 띠 동갑이라는 세월 탓인지,
아니면 타고난 성향 탓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 시절 나는 반항적으로 상대하기에
세상은 가늠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상식적이고
폭력적이라는 것을 직감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반항 보다는 순응을 선택했고,
힘을 가진 자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조심했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무자비한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는 선에서
나름대로 자유를 경험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나의 자유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다.
남몰래 나만의 세상을 창조한 뒤,
그 속에서 마음껏 누비며 살았던 그 때였다.
규칙(?!)에 순응했던 그 시절을
자유로웠다고 추억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판타지 때문이었다.
보이는 세계를 살아가면서 보이지 않는 세상을 누렸던
그 시절의 책들을 떠올려 본다.
안네의 일기, 그리스 로마 신화, 슈베르트 전기,
성채,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잃어버린 너에게,
고도를 기다리며….
그리고 그 시절의 친구들을 불러본다.
정희, 운옥, 광경, 상숙, 윤성, 유희, 선경….
잘 지내고 있니?
그러고 보니 너희 모두는
내게 무해한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미안해.
무해하다고 느꼈다는 건
너희를 잘 몰랐었다는 증거일 테니.
그래서 기도해.
너희가 어떻게든
너희의 삶을 살고 있기를.
#Aug. 21. 2020.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