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제자도
에마뉘엘 카통골레 크리스 라이스의 책, <화해의 제자도>를 읽고.
시작은 분명 이상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마지막은 아름다웠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책,
<화해의 제자도>는 내겐 그런 책이었다.
이상함은 <화해의 제자도>가
어떻게 나의 책장에 꽂혀있게 된 것인지
알 길이 없는데서 유래한다.
그도 그럴 것이 화해란
무릇 어린 아이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아닌가!
아이들에게 화해는 흔해 빠진 것이다.
손 쉬운 사과와 발 빠른 화해를 통해
신속하게 친구 관계를 회복하는 그들은
언제나 신나고 재미지게 논다.
반면, 어른들에게 사과나 화해는
어느 것 하나 손 쉽거나 발 빠를 수 없다.
이것은 어른들이 한 데 어울려
재밌게 놀지 못하는 이유들 중 하나일 것이다.
시큰둥하게 책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나를 한 번 설득해 보라는 객기로
꼬장꼬장하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중간 쯤 도착했을 때,
뜨거운 눈물이 문득 배어나왔다.
퍽 논리적인 내용에 탄탄한 구조를 가진 책이었건만,
뜬금없이 눈물을 흘리다니!
폭우 같은 눈물을 비쳤으니, 콜드 게임이 되었다.
이후로 나는 승리를 차지한 책 앞에서
겸손히 독서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깨어지고 분열된 세상에서 화해는 스테디셀러다.
왜 아니겠는가!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완전히 부러지고
골절된 관계를 위해 제시되는 화해가
고작해야 반창고 정도라는 것이다.
완치와 회복을 위해 상처를 후벼 파낸 뒤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는 본연의 화해는 희귀템일 뿐이다.
그래서 유사 화해 상품들이
시장을 활보하며 소비자들의 현혹하는 것일 테다.
캐치프레이즈용 화해, 이벤트성 화해,
개인 구원과 경건용 화해, 도피로서의 화해,
다양성과 다문화용 화해, 과거를 배제한 섣부른 번영의 화해,
갈등 해결용 화해 등 소비주의는
화해를 자르고 말리고 축소해서
쉽고 편리한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중이다.
그러나 화해는 절대로 쉽고 편리할 수 없는 종류이며,
빠르게 성취될 수 있는 종류는 더더욱 아니다.
화해는 항상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신약 성경은 그 선물을 회심(metanoia)
-돌이킴, 변화, 전환-이라고 부른다.
탄식을 통해 우리의 화해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긴 여정이며,
그 여정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용서,
우리의 희생이 가치 있다는 약속,
고통스러운 현장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인내-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음을 깨닫는다.
-본서 중에서
은혜의 선물 세트 중에 화해가 들어있다.
모든 은혜의 선물들이 그러하듯이 화해 역시
완성품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레고 블록과 비슷하여서
선물을 받은 사람의 적극적인 참여와
오랜 시간을 통해 조금씩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어가다가
마침내 성취되는 것이다.
레고 블록을 완성하기 위해서 매뉴얼의 도움이 필요하듯이,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도 매뉴얼이 매우 필수적이다.
화해를 위한 매뉴얼은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두 말할 것도 없이 성경이다.
하나님의 이야기, 하나님의 상상력,
하나님의 비전이 담긴 성경의 안내를 따라
화해를 소명으로 받아들인 제자들은 단절된 삶의 현장,
완고한 지금의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면서
꿋꿋이 화해를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화해를 위해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물러서는 법을 알아야 한다.
물러선다는 것은 도피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절된 현장에게 빼앗겨 버린 하나님의 상상력을 회복하고
그것을 새롭게 받아들이기 위한 최소한의 보호 장치다.
화해의 사역은 일상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화해의 제자들은 가장 가까운 가족,
친구와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늘 화해와 화평을 경험하고 누리려야 한다.
이 요청(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들 증인들의 삶의 특징인
비합리성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비합리성”(madness)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들 증인들이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지 않고(합리적인 행동)
미래의 비전에 따라 현재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본서 중에서
때때로 화해의 제자들은 미치광이로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화해라는 비전이
비합리적인 추구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홍수가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무려 산위에서 배를 만들었던 노아처럼,
하나님의 미래 비전을 따라
현재를 부지런히 바꾸어가는 자들이 화해의 제자다.
그러므로 화해의 길은
지속되는 맑은 날들 속에서 배를 짓는 모험의 길이다.
모험의 성패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지배당하는 대신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비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에 달렸다.
기억하는 방법 중 최고는
역시나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듣는 것일 테다.
탄식은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다. …
탄식을 배운다는 것은 세상의 상처에 다가가
그 곁에 머무르면서 상처를 노래로 표현하고,
상처를 씻어 주고, 고통에 찬 외침을
들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화해의 제자는 탄식의 명인이다.
절대로 서두르는 법이 없는 그들은
손쉽게 괜찮다고 하거나 빨리 잊어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깨어진 자들과 함께
고통스럽게 탄식하는 편을 선택한다.
그렇게 그들은 오래도록 고통 속에
충분히 머물 줄 아는 인내,
섣불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 않는 절제를
겸비하고 있는 자들이다.
순례 여행은 선교와 매우 다르다.
순례 여행의 목적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탐색하는 것이며,
도와주는 것이라기보다는 함께 있는 것이다.
순례자들은 서둘러 목적지에 가려하기보다는
속도를 늦추고 외침을 듣는다.
그들은 새 친구를 사귈 때처럼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발걸음을 늦추고 자신을 더 많이 되돌아본다.
순례자들은 이방인들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먹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들은 “먹는 입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우는 입의 소리도 들을 수 없다”는
르완다의 속담에 담겨 있는 변화의 지혜를 따라 여행한다. …
장기적으로 더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 내는 사람은
낯선 곳에 가서 집에 페인트칠을 해주는 사림이 아니라
친구가 되고 그 자신이 변화되는 사람이다.
순례자들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순례 여행으로 변화된 이들은
자신이 사는 세계를 바꾼다.
-본서 중에서
결국, 나의 정체는 선교사가 아니라 순례자였다.
선교사로 파송된 지 거의 10년이 되어 가는데도,
선교사라는 호칭이 마냥 낯설고 어색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선교지에서 해왔던
나의 사역을 뒤돌아보았다.
그것은 분명
선교 사역이기 보다는
화해의 사역에 가까웠다.
생산성과 효율성과 성취도가
여전히 중요한 메이저 선교 사역의 입장에서
나의 묵상 사역은 마이너 중의 마이너다.
‘성경 묵상? 그것은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에
쉽게 간과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역의 현장으로 정신없이 달려가는 동료들을
끌어당겨 주저앉힌 뒤, 함께 오래도록 머물면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게 하고,
하나님의 이야기와 본인의 이야기를
한데 엮어내도록 도와주는 것이 나의 묵상 사역이다.
이 때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님의 일이다.
그런데 성령님으로 인하여
그들보다 더욱 변했던 것은 나였다.
잠시 눈을 감고 되돌아보면,
묵상과 나눔을 통해 일상에서
화해와 화평을 경험했던 얼굴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서두를 수 없고, 서둘러서도 안 되는 일이라는 점에서도
묵상 사역은 선교사보다는
순례자에게 맞는 사역임이 틀림없다.
화해가 하나님의 일이라 여기며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과 의무가 아니라
기쁨의 추구가 이 긴 여정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
화해의 사역은 기법이나 방법론의 훈련보다는
스토리텔링과 도제식 교육을 통해 더 잘 유지된다. -
본서 중에서
그간의 묵상 사역에서 느껴졌던 염증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신실하게 사역하기 위해
지나치게 의무와 훈련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기쁨을 잃어버린 사역은 지속될 수 없다.
그러므로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
오 주여, 기쁨을 회복하소서!
스토리텔링과 도제식 교육은
묵상에 매우 적실한 교육법이다.
그간 묵상 기법이나 방법론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묵상 모임에 직접 참여하여
성경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과
지도자의 모범을 관찰하여
자신만의 방식을 터득하는 것이야 말로
묵상을 배우는 가장 확실한 교육법이다.
기독교 공동체의 특성은
환대, 개방성, 낯선 사람과의 지속적인 교류다.
코로나로 인하여 점점 무색해지는 특성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도 나는 여전히 꿈을 꾼다.
순례자들로 가득한 공동체, 탄식할 줄 아는 공동체,
서두르지 않고 오래도록 묵상하고 기도할 줄 아는 공동체,
참된 기쁨을 추구하는 공동체를.
키리에 엘레이손!
#Aug. 8. 2020.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