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
존 번연의 책, <천로역정>을 읽고.
첫 만남은 9년 전에 있었다.
한창 케냐 선교를 앞두고 있었던 터라
심란해진 마음을 애써 다스리던 때였다.
그 와중에 읽었던 책이 크리스천다이제스트에서
총 1부와 2부로 구성하여 출판한 <천로역정>이었다.
“어거스틴은 그의 책 <참회록>에서
회심을 일회적 사건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전 삶을 회심의 과정으로 이야기했다.
즉, 그는 <참회록>을 통해서 성도의 삶이
회심의 여정(Journey)임을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생각은
17세기 중후반의 존 번연에 의해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즉, 존 번연은 그의 책 <천로역정>에서
성도의 삶을 순례의 여정으로 그려 놓았던 것이다.
어거스틴의 회심의 여정이나 존 번연의 순례의 여정은
모두 목적지가 있는 여정으로서
그 목적지는 바로 하나님, 혹은 천국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여정을 그리는 형식과 방법의 차이인데,
어거스틴은 회심의 여정을 자서전 형식과
자기 고백 방법을 통해 그리고 있고,
존 번연은 내러티브 형식과
알레고리 방법을 선택하여 그리고 있다.”
-나의 <천로역정> 독서 리뷰(2011년) 중에서
두란노 출판사에서 새롭게 편집되어 출간된
<천로역정>을 재독했다.
전에 것과 비교하면 2부가 빠져버렸다는 점이 아쉬웠으나,
편집이나 번역적인 면에서는
개인적으로 이전 것보다 훨씬 좋았다.
재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은 상당히 재밌고도 의미심장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신앙을 여정과 내러티브로 보는 일에
여전히 흥미를 가진 독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독서하는 내내
지나온 나의 영적 여정을 되짚어보았고,
현재의 상태를 가늠해보았으며,
앞으로 가야할 길을 헤아려보았다.
17세기 존 번연의 책이
21세기 독자의 거울과 창문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때때로 세속 현자(Worldly Wiseman)씨의 논리에
속아 넘어갔던 나다.
그래서 도덕주의자들의 판단을 옳게 여기기도 했고,
깍듯한 예의와 평판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했던 것이다.
가끔은 수다쟁이(Talkative)씨의 현란한 말에
현혹이 되기도 했었다.
그들로 말할 것 같으면 동네에서는 성자처럼 말하나,
집에서는 악마처럼 구는 종류들이다.
가까워지면 본색이 드러나는 통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빠른 관계 대체를 위한
폭넓은 인간관계다.
때로 그들은 그와 같은 방대한 인간관계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도 한다.
종종 사심씨의 말에 흔들렸던 나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심씨는 이렇게 말하는 자다.
“저들은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해도
믿음을 지키겠다고 하네만,
나는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네.
저들은 비난을 받고 만신창이가 되어도
믿음을 지키겠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힘들게 신앙생활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네.”
독서 중에 만났던 세속 현자씨, 수다쟁이씨,
사심씨의 얼굴들이 구체적으로 하나 둘 나타났다 저 멀리 사라졌다.
나 또한 세속 현자씨나 수다쟁이씨 혹은 사심씨처럼
말하고 행동했던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 주제에 천성을 향해 걸어가는
거룩한 순례자 행사를 했던 것은 아닐까?!
회개의 무릎을 꿇었던 것은 은혜였다.
그렇게 책은
그분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선물이 되어주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최근에 경험하고 있는 디프레션을 두고
‘코비드 블루’라 이름 지은 것은 잘못된 작명일지도 모른다.
존 번연의 언어로 번역하면
그것은 의심의 성(Doubting Castle)에 사는
절망의 거인(Giant Despair)의 포로가 된 결과다.
잠시 잠깐 잘못 들어선 길에서 되돌아가려고
버둥거리다가 나는 절망의 포로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흠씬 두들겨 패서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고,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으로
공포에 굴복하게 만들며,
나아가 그럴 바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낫다고
호통 치는 절망의 거인에게 사로잡히다니!
그러나 의심의 지하 감옥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의외로 간단한데,
이미 내 수중에 있는 약속(Promise)의 열쇠로
감옥을 비롯하여 의심의 성의 모든 문들을 열고
유유히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나님의 성으로 향하는 순례의 여정은 규격형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맞춤형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삼거나
일반화 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순례자들은 그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길을 걸어갈 뿐이다.
그 길에서 그들은 서로 다른 시간과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무엇인가를
서로 다른 방식과 서로 다른 이유로 만난다.
그 과정에서 순례자들은 잘못된 길에 빠져
환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으나,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에
감사 또한 끊일 수 없다.
신실한 순례자들에게는
주의 은혜가 아낌없이 공급되는 덕분에
어려워도 기어이 순례의 여정을 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주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완주할 수 없는 길이
곧 순례의 길이다.
순례의 길에서 중요한 것들 중 하나는 동행자다.
각자 길 위에서 본 것들을 나누면서 위로와 격려,
교훈과 훈계를 서로 주고받을 때,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순례의 길을
즐겁고 생동감 넘치게 걸어갈 수 있다.
성도의 교제를 잘 가꾸면
깨어서 지옥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시종일관 지속되는 존 번연의 교훈들 중 하나다.
항상 하늘나라에 시선을 공정하십시오.
보이지 않는 것을 굳게 믿으십시오.
이 세상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무엇보다 마음 깊은 곳에 정욕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수시로 들여다보십시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십시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두 분께 있음을 잊지 마세요.
-전도자의 말, 본서 중에서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나,
마냥 주저앉아 숨어 있을 수만은 없는 순례자다.
앞으로 전진 하지 않는 자는 정착자일 뿐,
더 이상 순례자가 아닌 것이다.
세상 끝날 까지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주의 약속을 품고
동료들과 함께 모험을 계속해야 한다.
마침내 하나님의 성에 도착할 때까지!
키레에 엘레이손!
#Jul. 24. 2020.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