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에 관한 나의 이야기
유다에 관한 나의 이야기
선생과 제자는 일종의 동료다.
진리로 향하는 수많은 길들 중
하나를 이미 선택하여 나아가는 자가 선생이라면,
제자는 그의 뒤를 따르는 자다.
그러나 마냥 동료일 수만은 없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한 결 같이 선생의 보폭에 맞추어 따라가다가
선생 사후에 그의 유지를 받드는 제자 일색이 아닌 것이다.
선생을 능가하여 그를 제치고
앞으로 나가는 제자도 있을 것이고,
다른 길을 선택하여
선생과 작별을 고하는 제자도 있을 것이며,
나아가 선생과 원수가 되는 제자도 없지도 않을 테다.
가룟 유다는 예수께서 직접 선택하신 제자들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함께 걸었을 것이 분명한 그들이다.
그러나 시간을 따라 그들의 길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요한복음 12장(마리아 향유사건)은
어느새 그들이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13장은 유다가 기어이 예수님을 버리고
원수인 마귀의 제자가 되었음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요13:1-2)
사랑,
그것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내용의 핵심이었다.
너희가 내 제자라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응당 너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으로서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심으로써 모범을 보여주셨다.
이 때 자기 사람들 중에는 가룟 유다도 있었다.
그가 배신할 것을 미리 아셨음에도
유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맹목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은 본질상 절대로 맹목적일 수 없다.
“사랑은 맹목적이다”라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사랑이 맹목적인 동안에는- 즉 사랑이
상대편의 ‘전체’를 보지 못하는 동안에는-
사랑은 아직도 근원어 ‘나-너’의 지배하에 서 있지 않다.
미움은 원래가 “맹목적”인 것이다.
상대편의 부분밖에 더 보지 못할 때에만
미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를 보고 있는 사람은,
비록 그가 그 전체를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하여 있다 하더라도 미움의 세계에 살고 있지는 않다.
그는 이미 ‘너’여! 하고 부를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인간의 권내에 살고 있는 것이다.
-마르틴 부버, <나와 너> 중에서
맹목적인 쪽은 예수님이 아니라 유다였다.
그는 자기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선생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능력이 차고 넘침에도 불구하고, 로마를 멸망시킨 뒤
새로운 유다를 건설하려 하지 않는 선생이 미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선생이신 예수님을 ‘나’의 ‘너’가 아닌
‘나’의 ‘그것’으로 강등시키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스승을 팔아먹을 ‘상품’으로 비하하고 말았던 것이다.
반면, 예수님은 유다의 전체를 보셨다.
유다와 맺어왔던 인격적 사귐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가 그 선택, 곧 마귀의 사주를 따라
선생을 상품으로 팔아치우는 선택을 하지 않기를 원하셨다.
그 선택 후, 미움의 세상에서 살게 될 그가 몹시 염려되셨을 테다.
그렇게 사랑의 권능으로 늘 충만하셨던 예수님은
제자 가룟 유다를 미워하는 대신에 불쌍하게 여기셨다.
자신을 배신할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선생은 참 인간이다.
그러나 그런 선생을 배신하고
심지어 상품으로 팔아먹은 제자는 인간 이하다.
인간 이하의 종류는 금수의 축에도 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유다는 인류의 죄를 대신할 희생양이 결코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보르헤스의 상상력은 틀렸다.
말씀은 성육되면서 어느 곳에나 있는
만유로부터 한정적인 공간으로, 영원으로부터 역사로,
끝없는 행복으로부터 덧없는 변천과 죽음으로 건너왔다.
그러한 희생에 값하려면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한 인간이
적절한 희생을 치르는 게 불가피하다.
유다가 바로 그러한 대표로서의 인간이다.
유다만이 제자들 중 유일하게 비밀의 신성과
예수의 처참한 최후를 깨달았다.
‘말씀’은 스스로 낮추어 죽어가는 인간이 되었다.
따라서 ‘말씀’의 제자인 유다 또한 스스로를 낮추어 밀고자가 되고,
그리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의 손님이 될 수 있었다. …
신은 완전한 인간이 되었고, 심지어 치욕적인 인간,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고뇌의 심연에 빠져 있는 그런 인간이 되었다.
그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의 복잡한 그물을 구성하고 있는 운명들 중
그 어떤 운명을 택할 수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 또는 피타고라스, 또는 루릭,
또는 예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는 최저급의 운명을 선택했다.
그것이 바로 유다였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중에서
20대 때에 퍽 재밌게 읽었던 소설들 중에는
보르헤스의 것도 있다.
왜 아니겠는가?
환상적 사실주의, 메타 픽션이라는 명찰을 단
그의 단편 소설들은 젊은이의 뭉친 이성과 뻣뻣한 감성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 중에서도 <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는
읽은 지 거의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기억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저급 운명을 가진 유다야 말로 진정한 그리스도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틀렸다.
유다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구약의 희생 제물로도 사용할 수 없는
금수만도 못한 인간 이하인 것이다.
그래서 마가는 그를 가리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사람(막14:21)이라고 까지 했던 것이다.
유다의 삶은 끔찍하다.
최고의 선생을 만나 참 인간으로 가는 구원의 여정에 올랐으나,
최종적으로 선생을 배신하고 마귀의 수하가 되어
죽음의 먹이로 생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그런 유다가 마음에 밟히는 것은
유다의 전철이 내 것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참 인간이 되는 길,
구원의 여정에서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성경에 이어폰을 꽂고
바울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2)
#Mar. 18. 2020.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