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은자 히페리온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책, <그리스의 은자 히페리온>을 읽고.
내게 그리스인이란 조르바다.
머나 먼 케냐에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만났던 우리다.
그 후로 또 한 명의 그리스인을 만난 것은
6년 8개월 정도가 지난 요즈음이다.
히페리온.
우크라이나에서 나는 조르바와는 비슷하고도
썩 다른 그리스인 히페리온을 만났다.
조르바가 대지의 사람이라면,
히페리온은 신들(신화)의 사람이다.
조르바가 도시를 헤맸다면 히페리온은 자연을 누볐고,
조르바가 숱한 여인들을 육체적으로 사랑했다면,
히페리온은 오로지 디오티마만을 영혼을 기울여 사랑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동일하게 그리스인이었다.
무엇보다 자유를 추구했으며,
현재에 집중하며 그것을 축제처럼 충실히 즐길 줄 알았던 것이다.
횔덜린의 유일한 소설 <그리스의 은자 히페리온>은
서간체 소설이다.
주로, 주인공 히페리온이 독일인 친구 벨라르민에게 보낸
편지를 나열해 놓고 있는 것이다.
물론 중간에 히페리온이 운명의 여인 디오티마에게 보낸 편지와
디오티마가 히페리온에게 보낸 편지가 삽입되어 있긴 하다.
고로, 소설은 내러티브 중심이 아니라
사람의 내밀한 생각과 섬세한 감정에 대한 묘사 중심이다.
쉽게 말하자면, 재미가 별로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신성의 사람 히페리온이 사용하는 언어는 신화적 언어다.
문장들이 아름답긴 해도 저 높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구름 같았다.
땅을 밟고 구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로선
독서가 그리 쉬울리 없었다.
그리하여...
읽다가 자주 텍스트의 담을 넘어
딴 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종종 소리를 내어 낭독하는 수고를 했던 것은
생각이 텍스트의 담을 넘지 못하도록
강제하기 위함이었다.
자연 속에서 자연의 정령에 힘입어
자유와 사랑을 추구하는 귀족 청년 히페리온에게는
4명의 사람이 있다.
스승 아다마스, 친구 알라반다,
연인 디오티마, 그리고 독자인 벨라르민.
화자인 히페리온은 그들에게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관계의 끝은 공히 이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인 히페리온이 절망하는 법은 없다.
사랑을 잃은 고통 속에서도 히페리온은
자연이 그러하듯이 꿋꿋이 자유를 향해
자기 인생을 버텨나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불완전하지 않은 것은 없다.
이것은 독일인들이 늘 하는 말이다.
하지만 신에게 버림받은 이 사람들에게
누군가 이런 말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에게 모든 것이 불완전한 까닭은,
그들이 순수한 것 어느 하나 타락시키지 않은 것이 없고,
성스러운 것 어느 것 하나 그들의 멍청한 손으로
건드리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번성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이 번성의 뿌리를, 신적인 자연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에게 인생이 멋없고 근심 걱정투성이에
차갑고 암묵적인 불화만 가득한 까닭은,
인간의 행위에 힘과 고상함을,
고통 속에 쾌활함을 심어주고 도시와 집집마다
사랑과 형제애를 가져다주는 정령을
그들이 업신여기기 때문이라고.
-본서 중에서
소설 끝자락에서 모든 사랑을 잃고
히페리온이 도착한 곳은 독일이었다.
그리스인인 히페리온의 독일에 대한 평가는
거의 혐오에 가까웠다.
(참고로, 저자 횔덜린은 독일인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확실히 그리스인보다
독일인에 가깝다.;;
그런데도 그의 악평에 분이 나기는커녕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자연과 신화의 사람인 히페리온에 비하면
도시와 일상 속의 나는 얼마나 저품격 속물인가!
그럼에도 나는 히페리온이 부럽지 않으며,
나에게 ‘괜찮아!’ 라고 말할 수 있다.
히페리온도 나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나는 좋다.
그는 내게 볼멘소리를 해댈 테지만.ㅋ
저자 횔덜린은 마음이 나뉘지 않은 단순한 사람이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자유였고,
그의 소명은 시(詩)였으며, 그의 사랑은 오직 주제테뿐이었다.
서른 세 살의 나이에 소천한 주제테로 인하여
횔덜린은 정신이상을 일으켰고,
무려 삼십육 년이라는 세월을 갇혀 살게 된다.
어느 목수의 집 탑에 갇힌 채,
그는 끊임없이 주제테를 그리워했고,
작품을 썼으며, 자유를 갈망했다.
자유, 시, 사랑은
갇힘, 정신이상, 연인의 부재중에서도 추구되었다.
이것은 횔덜린이 그것들을 진심으로 추구했다는 증거이자,
아이러니하게도 그것들을 완성도 높게 실현시킬 수 있는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히페리온을 좀 더 이른 나이에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사람에 대한 애정보다는
부담이 커진 탓이겠다.
지나간 청년 시절의 나라면
그를 추켜세우며 퍽 좋아했을 것이나,
지금 중년의 나는 그가 위험하고도 안쓰럽게 보인다.
흐음.
체감은 겨울이나, 사실은 늦가을이다.
울긋불긋 바래져가는 잎들과
하나 둘 쌓여가는 낙엽들의 시간.
그렇게 계절도 나도 변해가는 중이다.
잘 가라 가을아,
그리고 그리스 청년 히페리온아!
#Oct. 12. 2019.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