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소설,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읽고.
물리적으로 퍽 얇고 가벼운 책이었다.
짧은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독서를 마쳤을 때,
책은 몹시 두껍고 무거운 책으로 변신되어 있었다.
이야기의 방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책은 여느 소설들처럼
세밀하고 생동감 있게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담담하고 고요하게 들.려.줄. 뿐이었다.
문장들 사이의 거리가 까마득했음은 물론이다.
책의 원제목은 <안남(Annam)>이다.
그것은 지명으로 프랑스가 식민지로 침략했던
베트남의 중부 지방을 일컫는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강탈하여 세 토막으로 쪼갠 뒤,
가운데 부분을 안남이라고 불렀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의 안남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베트남인들이 살고 있는 땅일 뿐.
존재하지 않으니
단 한 번도 그 곳에 닿은 적이 없을 프랑스다.
주요 인물들은
베트남으로 파송된 프랑스 선교사들이다.
때는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 삼기 일 세기 전.
일군의 수사들과 수녀들이 카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일 년 남짓 항해 끝에 베트남에 도착한다.
이후 이야기는 격변하는 프랑스와 베트남의 정세 속에서
지속되는 지난(至難)하고도 참혹한 적응기다.
이야기 속 선교는 잊혀짐의 과정이다.
프랑스는 파송한 선교사들을 잊고,
파송된 선교사들 또한 프랑스를 잊는다.
게다가 선교사들은 베트남과 부대끼며 살면서
자기 종교의 껍질 곧, 종교적(제의, 예배) 형식,
종교 생활의 규율과 규범, 종교적 의복,
신학적 교리 문답 등을 자연스럽게 잊어버린다.
고된 노동(적응)으로 인하여 빠지는 것은
성직자 특유의 펑퍼짐한 뱃살과 엉덩이 살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점차 군더더기 없는 핵심을 발견해 나간다.
선교하는 자에서 선교되는 자로, 능동에서 피동으로,
대단한 인물에서 무용하고 하찮은 인물로,
그러면서도 지극히 사랑스럽고 소중한 피조물들 중 하나가 된다.
일반 은총은 언제 어디서든 하찮을 수 없다.
제 아무리 특별 은총이 중요하다해도,
일반 은총의 너른 가슴이 품어주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특별해 질 수 없다.
베트남인들은 이방인 선교사들을 환대한다.
만물 속에 신이 있다고 믿었던 까닭이다.
비록 자신들과는 전혀 달라 보였지만,
그들은 프랑스인들 안의 신을 존중했다.
전도가 용이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여전히 자신들의 옛 신들을 함께 믿기는 했지만 말이다.
처음 베트남의 환대에 감격했던 선교사들은
그들의 성역(聖域) 없는 환대와 수용에 점차 염증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베트남의 잘못이 아니다.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 수녀가 묻힌 안남.
50년 뒤 도착한 프랑스 원정대는
그들 무덤가의 대나무 십자가를 부러뜨린다.
그렇게 선교사들을 묻은 안남에 세워진 것은
교회가 아니라 식민지였다.
그것이 그들 사역의 열매라면,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복잡한 마음이 드는 것은 비록 종파가 다르긴 해도
나 역시 선교사이기 때문일 테다.
이야기 속 카톨릭 선교사들과
비슷한 경험을 하는 중임은 물론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보다,
가만히 멈춰 생각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것이리라.
‘군더더기 없는 핵심’
일단은 이 문구가 마음 언저리를 꾸역꾸역 맴도는 중이다.
몇 년 쯤 뒤에 다시 꺼내 읽는다면,
어떤 문구가 심장을 물고 늘어질까?
그렇게 언젠가 다시 꺼내 읽기로 하면서
일단은 마쳐본다.
#Jun. 6. 2019.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