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지팡이 삼아
질문을 지팡이 삼아
기억이 너덜너덜 해진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기억의 용량이 형편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보유하고 있는 기억들도 대개 윤색이 되어
사실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기억에 자주 손을 담그면서 물장구를 친다.
고립된 선교지에서 은둔자로 살아가는 탓이겠다.
하영양은
15개월 때 이미 수많은 단어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이가 세 살 무렵이나 되었을까?
‘데카르트’라는 이름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세 살 박이의 작은 입에서
세 살 박이의 짧은 발음으로 듣는 ‘데카르트’는
퍽 재미가 있었다.
너무 자주 시켜서
아이가 짜증을 내는 모습을 포함해서 말이다.^^;;
어쩌면 ‘영원’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도 같은 종류일 것이다.
의미하는바 정확한 뜻도 모른 채 그저 발음만 하는 아이처럼
나 또한 ‘영원’이라는 말을 대충 내뱉는 것이다.
그런 것이 어디 ‘영원’뿐이겠는가!
어쨌든, 조약한 나의 기억에 비하면
하나님의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선택적·제한적·일시적 기억이 아니라
영원한 기억을 보유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 기억의 갑부께서
예레미야에게 자기 기억의 카드 한 장을 꺼내 드신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렘 2:2)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신앙의 낙제점을 받아
광야에서 나머지 공부를 했던 이스라엘.
그곳에서 그들은 믿음의 기본기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했다.
그러나 출애굽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통해서
믿음의 101은 이미 수료했다고 여긴 그들이었다.
유급되었으니 믿음의 기초를 다시 수강하라는 명령이
받아들이기 쉬울 리 없었다.
그러나 명령은 돌이킬 수 없었고,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울면서 겨자를 먹어야 했다.
이후 믿음의 수련은 험난했다.
반복되는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켜
멸망을 당할 뻔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종이자 자신들의 지도자인
모세의 복장을 터트려 죽이려는 듯이
믿음 없는 짓들만 골라서 하는가 하면,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미화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폄하하고 곡해하는
거짓 뉴스를 만들어 불신앙을 조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재차 낙제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그들 자신에게 있지 않았다.
점수를 주시는 하나님이 자비의 왕이셨고,
그들의 지도자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온유의 화신이었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무참했던 이스라엘의 광야 시절을
하나님은 청년의 때, 신혼의 때로 기억하신다.
그 시절의 이스라엘이 자신에게
인애(헌신)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억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민수기의 증언에 따르면
광야의 이스라엘은 한낱 패역한 백성일 뿐이다.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아름답고도 순결한 신부는 어디에도 없다.
광야의 이스라엘에 대한
민수기와 예레미야의 하나님의 기억이
서로 상반된다는 사실이 의아하다.
대체 무슨 이유로 하나님은 그 시절의 이스라엘을
예쁘게 기억하시는 것일까?
대체 무엇이 하나님의 기억을 곱게 윤색한 것일까?
예레미야 2장을 계속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의 반복을 만나게 된다.
‘They did not ask, "Where is the LORD..."’(렘 2:6)
‘The priests did not ask, "Where is the LORD?"’(렘 2:8)
출애굽 지나 광야, 광야 지나 가나안 정복,
가나안 정착과 함께 시작된 사사 시대를 지나 왕정 시대,
왕정 시대를 지나 남북 분열 왕국 시대,
그리고 분열 왕국들이 멸망을 하는 시점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부지런히 잊어왔다.
그리하여 위기가 산처럼 덮쳐 와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을 생각을 못했고,
그래서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는 법이 없었다.
반면, 광야 시절을 달랐다.
비록 하나님의 속을 새까맣게 태우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최소한 광야 시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모세에게 다그쳐 묻기는 했던 것이다.
그러면 모세는 곧장 하나님께로 달려가서
어찌 해야 할지를 물었고,
하나님은 어쨌든 근면히 이스라엘의 피난처가 되어주셨다.
멸망을 코앞에 둔 이스라엘.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묻지 않았다.
묻기는커녕 친절하게 다가와 피난처를 기억하라는
예레미야를 조롱하고 모욕했다.
심지어 제사장들 또한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지 않는 운동에 아낌없이 동참했다.
캔 가이어의 책, <하나님의 침묵>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모쉬는 ‘사람은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일으켜 세우게 되지.
그것이 참된 대화라네.
사람은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은 대답하시지.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대답들을 이해하지 못해.
이해할 수 없어.
왜냐하면 그 대답들은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오기 때문이지.’라고
반복해 말하기를 좋아했다.
나는 ‘모쉬, 그러면 왜 기도하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
내가 하나님께 바른 질문들을 할 수 있게
힘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거라네.' 그는 대답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질문하길 거부하다가 망했다.
질문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일으켜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과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공동체나 개인은 없을 것이다.
‘그분께 마지막으로 질문을 했던 때가 언제였더라?’
문득 떠오른 생각이 가뜩이나 침침한 눈을 캄캄하게 만든다.
습관성(?ㅋ) 질문으로 말을 걸어오는 하진군처럼
질문을 지팡이 삼아 그분을 향해 나를 꾸준히 일으켜 세울 일이다.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키리에 엘레이손!
#May. 30. 2019. 사진 &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