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삶을 먹다
웬델 베리의 책, <온 삶을 먹다>를 읽고.
농업 일색의 책이었다.
그것과 별 상관없이 살아온 독자라면
딱히 재미를 느낄 리 없다는 판단이었다.
나는 그런 류의 독자였고, 큰 기대 없이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몇 장이 채 지나지 않아 탄성이 쏟아지고 말았다.
“굉장해!”
그 후로 일어난 일은
섣부른 판단에 대한 미안함으로 근면히 찬사하는 것이었다.
농부이자 작가인 웬델 베리의 책,
<온 삶은 먹다>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건실한 농업이란?에 대한 작가의 대답을,
2부에서는 건실한 농부를 탐방하고 난 후기를,
마지막 3부에서는 건실한 농부들이
먹거리를 나누어 먹는 방식을
작가 자신의 소설 속 몇 장면에서 발췌하여 보여주고 있다.
효율성과 생산성은 적절한 기준이라고,
보살핌은 과학으로 지력은 화학으로 간단히 환원할 수 있다고,
유기체는 기계일 뿐이라고,
농업은 자연에 대하여 아무 의무도지지 않는다고,
농업에는 농업적인 결과만 있을 뿐이라고,
농업은 ‘값싼’ 화석연료에 안심하고 의존해도 된다고
가정했던 한에서 말이다.
-본서 중에서
농부인 웬델 베리의 생각은 단순·명쾌하다.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대규모 산업 농업의 폐해에서 벗어나,
소규모(적정 규모) 자영 농업으로 돌아가자!’
이는 건실한 농업을 회복하자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서 작가는 산업 농업과 자영 농업을 꼼꼼히 비교한다.
산업 농업은 일단 규모가 크다.
그것은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획일화된 농업 공장(거대한 단일 품종 밭들, 돼지우리나
양계장과 같은 거대한 막사 등)을 지어
비싼 시설 설비와 기계를 들여와 화석 연료(석유)와
각종 화학 약품(비료, 농약, 항생제, 성장 촉진제 등)에 의존하는
특화된 작물만 대량 생산한다.
그 과정에서 지력(地力; 농작물을 길러내는 땅의 힘)은
형편없이 고갈된다.
농부에게서 저렴하게 사들인 대량 생산된 농작물은
어쩐 일인지 소비자에게는 별로 싸지 않게 공급된다.
식품 위생법 등 다양한 법을 등에 업은 유통업자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농작물에 각종 부가세를 얹어
비싸게 팔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는 농부는 단일 품목만 농사 짓도록 유도되기 때문에,
농부조차도 자기 먹거리를 마켓에서 사서 먹는 소비자가 되며,
농업에 있어서도 그는 한낱 보조 기술자일 뿐이다.
결국, 산업 농업의 농산물은 분업화로 찍어내는 상품일 뿐이면,
그 결과는 엄청난 쓰레기가 남는다.
반면, 자영 농업은 규모가 작다.
그것은 지역적 특성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그에 맞는 방식을 창의적으로 만들어 내고,
다양한 작물들을 돌려짓기 하며,
자신의 노동력과 함께 말과 같은 가축을 농사에 이용하는가 하면,
햇빛, 축분의 거름을 사용하여
지력이 고갈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돌본다.
비록 작은 규모로 농사를 지으나
작물의 질과 양을 모두 고려하면서 재배하는 것이다.
이 때 농부는 기술자가 아니라 예술가다.
즉, 산업 부품처럼 한 가지 특화된 작물을 기르는 기술자가 아니라,
땅, 환경, 생태, 그리고 경제 등 모든 것을 고려하여
자기 농업 전체를 디자인하는 예술가인 것이다.
게다가 농부는 자신의 먹거리를 높은 수준으로 자급자족하며,
농산물을 상품이 아닌, 생명으로 다룬다.
자영 농업은 자연적으로 유기농을 지향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관계로 쓰레기가 생기지 않고,
모든 것은 자연 안에서 순환하게 된다.
위의 이야기들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농부들,
그리고 국가적으로 농업을 관장하고 연구하는 기관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일 테다.
그렇다면 도시에 사는 보통에 사람들과 농업은 상관없는 것인가?
웬델 베리는 그들 역시 농작물(곡식, 채소, 고기)을
먹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별개일 수 없으며,
고로 책임 있게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느 정치학과 마찬가지로 먹거리의 정치학은 우리의 자유와 연관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과 목소리가 다른 누군가의 통제를 받을 경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아직은 잊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먹거리와 그 원천이 다른 누군가의 통제를 받을 경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은 간과해 왔다. 수동적인 먹거리 소비자로서의 조건은 민주적인 조건이 아니다. 책임 있게 먹어야 하는 이유 하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다.
그런데 먹거리의 정치학이 있다면, 먹거리의 미학과 먹거리의 윤리학도 있을 텐데, 둘 다 정치학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성 산업에서의 성과 마찬가지로, 식품산업에서 먹는 행위는 열등하고 부실하고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우리의 주방과 여타 먹는 장소들은 점점 더 주유소를 닮아 간다. 우리의 집이 점점 모텔을 닮아 가듯 말이다. 이제 우리는 “삶은 그리 흥미로운 게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린 듯하다. “삶의 만족은 최소한으로, 되는대로, 빨리 누리도록 하자.”고 하는 듯하다. 우리는 일터에 가기 위해 서둘러 끼니를 때우고, 저녁이나 주말이나 휴가 때 ‘레크레이션’을 즐기기 위해 서둘러 일을 때운다. 그리고 최대한의 속도와 소음과 폭력을 다해 서둘러 레크리에이션을 때운다. …
거대한 규모의 단일경작 방식으로 기른 채소란 독한 농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좁디좁은 데 갇혀 사는 동물이 항생제나 각종 약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달리 말해 소비자는 식품 산업에서, 다른 여느 산업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사가 질과 건강이 아니라 양과 가격임을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산업화된 먹거리 경제 전체가, 거대한 농장이나 사육장에서부터 슈퍼마켓 체인이나 페스트푸드 레스토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양에만 집착해 왔으니 말이다. 식품산업은 끊임없이 규모를 확대해 왔는데, 이는 양을 늘리기 위해, 그리고 원가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다양성은 떨어진다. 다양성이 떨어지면 건강이 부실해지고, 건강이 부실해지면 약품이나 화학 물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자본은 노동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사람인 일꾼을, 땅의 천연적인 건강과 비옥함을 기계와 약품과 화학물질로 교체해 버린다. 먹거리는 이익률을 높이는 여하한 수단이나 편법에 의해 생산된다. 광고업게 분장사들의 역할은 소비자를 설득하여, 그렇게 생산된 먹거리가 질 좋고 맛 좋고 건강에 좋으며 부부애와 장수의 증표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
먹는 즐거움은 ‘포괄적인’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식도락가의 즐거움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채소가 자란 밭을 알고 그 밭이 건강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라는 작물의 아름다움을 기억할 것이다. 이를테면 잘 가꾸어진 밭에서 새벽 빛 속에 이슬 머금은 작물의 모습 같은 것 말이다. 그런 기억은 먹거리를 대할 때 절로 연상되며, 먹는 즐거움 중 하나다. 먹거리가 자란 밭이 건강하다는 걸 알며, 먹는 사람은 마음이 편해진다. … 먹는 즐거움의 참으로 중요한 일부분은, 먹거리의 원천인 생명과 세계를 정확히 의식하는 데 있다. -본서 중에서
농사에 관한 책이 이토록 재밌고
유익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농사가 문화의 근원이기 때문일 테다.
문화의 사전적 뜻은 이렇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 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ㆍ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
농사, 곧 자연을 경작함으로 인간은 문화를 이루었다.
인간은 의도를 가지고 자연을 경작하여
특별한 생명을 키워 얻어내는 일을 반복하면서
문화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는 자연 안에서, 자연과 함께,
자연의 지원 속에서 인간만의 독특함을 꽃피우는 행위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은 노예처럼 착취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배려하면서 사이좋게 살아가야 하는 형제다.
농사는 생명을 다루는 문화이자 예술이다.
그런 점에서 목회는 그것을 닮았다.
목회란 사람의 생명을 대상으로 하며,
생명의 근원인 사람의 마음을 경작하는 일이며,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심는 일이며,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이 맺기를 소망하면서
열심히 수고하는 농사인 것이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 등 많은 목회 신학자들이
웬델 베리에 열광하는 것일 테다.
실제로 그의 글에서 <농업>이라는 단어를
<목회>로 치환하여 읽어도 전혀 무리가 없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할 때 얻게 되는 통찰들이 상당했다.
그것은 필시 오늘날의 목회가
농업이 산업화를 추구하는 것과 방향을 같이 하여
대형화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대 교회 추구, 전문성을 이유로
각종 기술들(매니지먼트, 마케팅, 부동산, 건축,
리더십, 각종 프로그램 등)의 분별없는 사용,
지역적 특색을 고려하지 않는 프랜차이즈화 된 교회들,
때를 따라 심고 거두는 질적인 목회가 아니라
생산성과 효율성 곧 양적인 성과주의 목회가
판을 치고 있는 현실에서 웬델 베리의 글은
선지자의 목소리로 들려진다.
개인적으로 일전에 읽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책보다 훨씬 좋았다.
그의 책이 자연 보존에 초점을 두었다면,
웬델 베리의 책은 친환경적이고
생태적인 자연 경작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래저래 나는 기독교인(문화명령을 따르는)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게 해서 웬델 베리는
나의 선생님(!)으로 임명되셨다.ㅋ~
어찌 된 일인지 선생님의 글을 읽는 도중에
자주 흙냄새를 맡았고, 읽고 나면 포만감도 들었다.
뛰어난 통찰력과 명쾌한 이름 짓기,
그리고 글 자체가 함의하고 있는 다채로운 의미들이
자유롭게 확장되면서 활발하게 사고하는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일 테다.
감사합니다, 쓰앵님~
하느님의 몸 말고는
먹을 게 없으니,
있으면 찾아보라.
신성한 식물과 바다는
하느님의 몸을
상상에 내맡긴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 중에서
May. 8. 2019.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