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지기들 2019. 2. 26. 17:11







조지 맥도널드의 책, <공주와 고블린>을 읽고.



“나는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 같은 모든 사람을 위해 쓴다.”


조지 맥도널드의 독자 군(群) 안에 내가 있다. 

나는 어린이 같은 사람이긴 하다. 

확실히 철없는 구석이 있고, 

여전히 판타지(요즘엔 무협 쪽 판타지)를 좋아하며, 

인형(캐릭터) 놀이를 머릿속에서 즐기고, 

셈이 느려 약삭빠른 어른들(?)한테 

손해 볼 때가 있는 편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엄연한 어른이다. 

그것이 이 책 <공주와 고블린>이 

마냥 즐겁지 만은 않은 이유일 테다.


<가벼운 공주>, <황금 열쇠>, 

<북풍의 등에서>에 이어서 읽은 

조지 맥도널들의 책 <공주와 고블린>에서 

화자는 중요한 등장인물이다. 

그는 이야기 통제자로서 이야기의 전개 방향, 

눈여겨 보아야할 포인트, 

나아가 다음번 책의 예고편 까지 

친절(?)하게 소개한다. 


이와 같은 화자의 역할이 

어른인 내겐 슬쩍 불편했다. 

과도하게 참견하고, 

이야기를 강제로 주도하고 있다는 생각에 

반감마저 들었다. 

아마도 어린이들이라면 

이런 종류의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른인 나는 

화자에 대한 저항감을 꺾어가면서 

독서를 진행시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요샌 책 읽기가 웬만하면 전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즐길 만한 책임에는 틀림없다. 

책은 폭포가 있는 강줄기를 여행하는 것과 같은 

다채로운 속도감을 느끼게 해준다. 

처음 출발은 샛강에서 천천히 시작된다. 

그런데 한참을 강줄기를 타고 가도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체 사건은 언제 터지는 거야?' 하며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는 3분의 2지점에 이르면, 

상황은 갑작스럽게 돌변한다. 

급격히 빠른 물살(고블린의 습격)을 타고 곧장 

폭포에 이르면 곧바로 낙하(대홍수)를 경험하고 만다. 

그 후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유유히 강변에 도착하게 되고, 

다음 예고편을 듣게 된다.  



하지만 네가 나를 

꿈에서 봤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일찍 나를 찾아 올 수 있었겠지. 

그래도 한 가지 이유는 말해 주마. 

그건 네가 찾아오는 걸 내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야. … 

문제는,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네가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거지. 

나를 만난 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걸 

네가 믿는가 안 믿는가 하는 게 중요한 거야. 

물론 할미는 네가 나를 찾아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하지만 그건 사실 네게 달린 문제거든. 

-본서 중에서


=믿음을 이렇게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는 고조할머니라니! 

그것은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에 

한쪽의 노력이나 정성만으로는 소유할 수 없다. 

상대의 애씀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편에서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내편에서의 최선.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면 

그것의 공로(功勞)는 나의 최선이 아니라 

상대편의 최선에게 있겠다. 

나의 최선이란 지극한 기본에 속함으로 

공로로 분류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그분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최선을 다하셨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믿게 된 것이다.  



부인은 산 중턱의 가난한 오두막집을 

작은 천국으로 만들었다. 

어두컴컴한 땅속 막장에서 일하던 

남편과 아들이 돌아와 쉴 편안한 천국 말이다. 

-본서 중에서


=나의 사역 중 하나는 

가난한 오두막집을 작은 천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선교지에서 일하고 공부하던 남편과 아들이 

돌아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처소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선교의 산을 

힘겹게 오르고 있는 이들의 베이스캠프요, 

낯선 이방 땅에서 상처받고 

학대 받는 자들의 피난처다. 



비록 먼 길로 빙 돌아가는 것 같더라도 

절대 실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네가 실을 잡고 있는 한 

이 할미도 잡고 있다는 점이야. … 

두려움은 사라졌다. 

다시금 할머니의 실이 자기를 거기까지 

데려와 놓고는 버리고 갈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 

공주는 할머니가 반대편 어디에서 

실을 잡아당기고 있는 믿음이 생겼다. 

-본서 중에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실이 내 손가락에도 감겨져 있다. 

실을 따라 가는 여정은 모험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상상도 못했던 길, 

생각보다 위험하거나 평안한 길로 인도하는 

실을 따라 가는 모험이 쉬울 리 없다. 

그러나 이 길 끝, 그러니까 반대편이자 목적지에서 

그분이 실을 잡아당기고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때론 팽팽하게, 그보다 더 많게는 느슨하게 

실을 느끼는 나는 이 여정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실을 끊어버릴 리가 없는 그분임을 알고 있기에.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믿고 싶은 만큼만 믿기 마련이지. 

더 많이 믿는 사람들이 

더 적게 믿는 사람들을 비난해선 안 돼. … 

커디에게 잠시 시간을 주도록 하자꾸나. 

안 믿어 준다고 해서 원망하면 못써. 

물론 견디기 힘든 노릇이지. 

하지만 이 할미는 그것을 견뎌왔고, 

앞으로도 수없이 견뎌야 할 거야. … 

이번에는 사람들이 자기 말을 믿어 주지 않으면 

어떤 심정이 되는지 커디가 직접 겪어 볼 차례였다. 

-본서 중에서


=아이린 공주의 말을 믿지 못하는 커디, 

그리고 커디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경비병들. 

이해받지 못하는 자들은 

괴로움으로 믿지 못하는 자들을 비난하고, 

믿지 못하는 자들은 헛소리를 한다며 

믿는 자들을 모욕하고 조롱한다. 

이 때 양자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 

시간 속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자는 견디고, 

믿지 못하는 자는 이해받지 못하는 경험을 한다. 

오래 살고 볼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래서 장수가 축복일 테다.



그자들은 자기들이 대단한 존재인 줄 

착각하고 있다니까요! 

보잘 것 없는 미물들이 원래 다 그렇잖아요. 

몸집 작은 우리 집 꼬마 수탉도 안마당에선 

자기가 제일인 줄 알고 뽐내듯이 말이에요. 

-본서 중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하나님의 위대함’의 사이즈 확장이다. 

안마당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꼬마 수탉이었던 시절의 ‘하나님의 위대함’이란 

민망한 수준이었다. 

안마당을 벗어나 이곳저곳 커다란 광장을 돌아다니다 

도착한 이곳에서 나의 ‘하나님의 위대함’은 부쩍 자랐다. 

상대적으로 반비례하는 ‘나의 위대함’은 

냉큼 작아졌고 말이다. 

그렇게 작아지는 나는 

미물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완전변태 중이다.






#Feb. 25. 2019. 글 by 이.상.예.